납북자 김영남(45·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씨의 거짓말을 들으면서 이산가족 상봉을 더는 이런 식으로 끌고 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봉을 무슨 이벤트인 양 하는 것도 모양이 안 좋은데 정치선전의 장(場)으로까지 이용해서야 되겠는가.
애당초 김 씨 모자(母子) 상봉을 이산가족 행사에 끼워 넣는 게 아니었다. 두 사안은 성격이 다르다. 김 씨는 납북자이고, 다른 150명의 남측 이산가족들은 말 그대로 전쟁 통에 갈라진 사람들이다. 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 씨 모자는 다른 날, 다른 장소에서 만났어야 했다. 함께 섞어 놓으니까 ‘납북 범죄’는 사라지고 ‘상봉의 감동’만 남고 말았다.
그렇게라도 만나야 했겠지만 일본과의 관계는 또 불편해졌다. 일본은 북한이 납치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한국 정부가 도와줬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언론부터 “한국은 이번 행사로 납치문제를 잊어버리자는 것이냐”며 흥분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충분히 예상했을 북의 전술적 간지(奸智)가 새삼 놀랍다. 거기에 끌려간 한국정부만 우습게 됐고….
차제에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1985년 9월 첫 상봉이 이뤄진 이래 21년 동안 남북 합쳐 1만5500여 명이 상봉행사에 참여했지만 그뿐이다. 그만큼 만났으면 상봉의 정례화-서신 교환-상호 고향 방문-가족 결합 순으로 진전이 있어야 옳다.
그동안 북에 지원한 쌀과 비료만도 얼마인가. 정부는 “화상(畵像)상봉도 하고 있고, 금강산에 면회소도 짓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차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일종의 진화(進化)다. 상봉만 할 것이 아니라 서신 교환, 고향 방문 순으로 단계를 높여 가야 한다는 얘기다.
적어도 한 번 만난 가족끼리는 편지쯤은 주고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한 번 보고,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헤어지면 가슴에 멍만 더 든다. 많은 상봉자가 극심한 그리움 속에서 우울증을 앓거나 지병이 악화돼 세상을 뜨는 것도 그래서다. 생각해 보라. 꿈에 북녘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면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하는 한탄이 왜 안 나오겠는가.
이산가족은 분단의 1차적 피해자들이다. 분단의 상처를 온몸으로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비극과 고통을 외면하면서 ‘민족끼리’와 ‘통일’을 외치는 것은 노골적인 위선(僞善)이다. ‘진보 정권’을 자처하면서 국민의 불행엔 왜 그토록 무심한가. 북한 사람들 불러다가 6·15통일축전은 성대히 치르면서 이산가족을 위한 서신 교환이나 고향 방문 한번 진지하게 제의해 본 적이 있는가.
“북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말은 안 했으면 한다. 북에 대한 ‘내재적 접근’도 철없는 소리다. 말이 나온 김에 분명히 해두자. 이산가족의 한(恨)이든, 북한 주민의 굶주림이든, 이제는 모두 ‘인간 안보(human securities)’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인간 안보’란, 냉전 종식 후 전통적인 ‘국가 안보’만으로는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하기 어려워 국제사회가 ‘개인 안보’까지도 직접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북한이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다. 국가(김정일 정권)가 국민(개인)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위협하고 있어서 국제사회가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고, 필요하다면 개입해야 할 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북의 범법 행위와 주민의 고통에 침묵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안보’는 2000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국가주권보다 개인주권이 우선”이라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은 ‘공포와 궁핍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선언한 이래 21세기 국제질서를 규율하는 중요한 원칙의 하나로 떠올랐다. 평소 북한 인권문제에 관대했던 사람들이라면 ‘인간 안보론’을 좀 더 천착해도 좋을 듯싶다.
김영남 씨는 어제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들 모자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 씨는 어머니를 8월 평양 아리랑공연에 초청했다. 정부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어머니 최계월 씨의 방북을 긍정 검토할 것이라고 한다. 북의 납치범죄가 이런 식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이는 ‘인간 안보’의 실현일까, 훼손일까.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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