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 문제에 대한 남측의 해명 요구에 대해서는 “6일 외무성 대변인이 밝힌 대로 이해해 달라. 그때 충분히 다 했다”며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당시 “통상적인 군사훈련이며 미사일 발사는 자주국가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이산가족 상봉 줄 테니 쌀 달라’=남북장관급회담 이틀째인 12일 남측 수석대표인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기조발언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강한 유감을 표시한 뒤 “현 정세를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북측의 6자회담 복귀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남측 전역을 사거리로 하는 스커드미사일을 동시에 발사한 것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을 무색하게 하는 행위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북측은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과 혁명열사릉 등에 대한 참관지 제한 철폐, 한미합동군사연습 중지, 국가보안법 철폐 등 이른바 ‘3대장벽 철폐’ 요구로 맞섰다.
이와 함께 정부가 ‘미사일 문제 등의 해결 전까지 지원 유보’를 천명한 쌀 50만 t에 대한 지원도 요구했다. 그 대신 10월 추석을 맞아 이산가족의 금강산 직접 상봉 및 화상 상봉을 동시에 실시하자는 ‘선심’도 썼다.
▽“회담 강행이 망언 여지 준 것 아닌가”=권호웅 북측대표단장은 비공개회의 직전 공개된 모두발언에서 “100여 년 전에 조상들이 화승총이 없어 망국조약을 강요당했다”며 ‘화승총=미사일 또는 핵’이라는 뜻을 시사했다.
권 단장은 이어 “그렇기 때문에 북과 남이 합쳐 우리 민족 자체를 지키고 보호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며 “자기를 지킬 힘이 없어서 40년 동안 노예생활, 짐승만도 못한 식민지 노예살이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 조상이 후손에게 부탁하고 가르치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관부(關釜)연락선’(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잇는 연락선으로 1905년 처음 출항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 운항)을 언급하며 “부산은 망국의 설움이 짙게 밴 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군정치가 남측 안전을 지켜준다’는 망언에 대해 회담장 주변에서도 “저런 소리 들으려고 회담을 열었느냐”는 얘기가 나왔다. 한 관계자는 “미사일을 쏜 북한이 참석 여부에 대한 확답도 주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회담을 강행하는 바람에 망언을 할 여지를 준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씁쓸해했다.
‘남측 안전 보장’ 운운은 이미 북한에서 사용해온 논리.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일 “다른 나라나 지역 같으면 열 번도 더 전쟁이 터졌을 조선반도에서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공화국의 선군정치 덕”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6월 12일에는 “우리의 강력한 핵 억제력이 있기에 남조선 동포들은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남북장관급회담을 보도하면서 “권 단장은 ‘선군을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은 선택이다. 앞으로도 선군의 길로 계속 나아갈 것’이라고 강조했다”면서도 “선군정치가 남측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주장한 대목은 소개하지 않았다.
권 단장은 전날에 이어 “외부에서 오는 재앙이 민족 내에 발붙일 자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민족공조를 강조했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몰릴 때마다 ‘우리 민족끼리’의 원칙을 강조해 왔다. ‘2차 북핵 위기’가 한창이던 2003년 1월 제9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전쟁 위험은 외부로부터 오고 있다. 북과 남은 불가분의 통일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남북한 대표 기조발언 비교 | |
남측 | 북측 |
-미사일 발사는 남북관계를 난관에 빠뜨리고 대화 통한 문제 해결을 원하는 국제 여론에 대한 도전. 추가적으로 한반도 긴장 고조 방지 요구 -유관국과 북측 이익에 부합하는 조속한 6자회담 복귀와 9·19공동성명 이행 촉구 -북측 인사의 남측 내정간섭 발언 재발 방 지 위한 조치 요구 | -8·15평양대축전 참가 남측 대표단의 북측 체제 상징 성지, 명소, 참관지 방문을 금지 하는 정부 방침 철회 요구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쌀 50만 t과 경공업 원자재 지원 요구. 추석 이산가족 금강산 직접 상봉 및 화상 상봉 제의 -선군정치가 남측의 안전 도모해 주고 남측의 광범한 대중이 그 덕을 보고 있다고 주장 |
부산=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또 뒤통수 맞은 정부▼
북한이 제19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미사일 발사에 대해 성의 있는 해명을 하기는커녕 ‘선군정치가 남측의 안전을 지켜 준다’는 궤변을 늘어놓음에 따라 정부가 더욱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졌다.
회담에 앞서 국내외에서는 ‘회담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고 미사일을 발사한 북한에 부담을 주려면 회담을 연기하는 게 좋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됐다. 그럼에도 정부가 회담을 강행한 것은 북한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참석 등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북한은 ‘미사일이 남측의 안전을 지켜 주는 화승총’이라는 해괴한 논리까지 펼쳐 미국과 일본이 장관급회담 개최에 보내는 싸늘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회담을 개최한 정부의 ‘성의’를 무색하게 했다.
정부 관계자는 “그렇지 않아도 국내에서 장관급회담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았는데 망언으로 정부 입지가 더욱 좁아지게 됐다”고 걱정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곤혹스러움이 묻어 나왔다”며 “북한이 남측의 성의를 알아주기는커녕 망언까지 한 데 대해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권 관계자는 “장관급회담이 북한의 체제 선전장으로 변질됐다”며 “이번 회담은 국내외적인 대북 정책의 실패를 한꺼번에 보여 주는 단면도”라고 말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