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라피노 교수 “北 정책조율도 안된채 미사일 발사한듯”

  • 입력 2006년 7월 15일 03시 00분


11일 일본 미야기 현의 온천마을 자오에서 만난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 그는 미야기 자오 로열호텔에서 열린 일본 국제연수교류재단 주최 국제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미야기=김정안 기자
11일 일본 미야기 현의 온천마을 자오에서 만난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 그는 미야기 자오 로열호텔에서 열린 일본 국제연수교류재단 주최 국제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미야기=김정안 기자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중국, 남북한, 일본, 몽골 등 동아시아 지역과 미국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사진은 2002년 방한해 성균관대에서 동북아 안보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연합뉴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중국, 남북한, 일본, 몽골 등 동아시아 지역과 미국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해 왔다. 사진은 2002년 방한해 성균관대에서 동북아 안보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연합뉴스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의 평양∼베이징(北京)∼도쿄(東京) 여행은 그 일정만으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5일 오전 3시 32분 북한이 첫 미사일을 발사하기 불과 5시간 전 그는 평양에 들어갔다. 그리고 전 세계가 숨을 죽이며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던 3일 동안(4∼7일)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 내 동아시아 연구의 최고 권위자. 미국 학계는 물론 정계에서 차지해 온 그의 위상을 감안하면 이번 평양 방문을 단순한 ‘연구 여행’으로 넘겨 버리기 어렵다.》

11일 일본 미야기(宮城) 현의 온천마을 자오(藏王)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일본 국제연수교류재단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다. 동북아 안보를 주제로 한 세미나였다. 일본 중국의 전문가들과 피터 벡 국제위기감시기구(ICG) 동북아사무소장 등이 참석했다.

분임 토의 사이사이 스칼라피노 교수를 만나 그의 평양 여행기를 들어 봤다.

―방북은 어떻게 이뤄진 건가.

“미국에서 방북하는 인사들의 채널은 유엔 주재 한성렬 북한대표부 대사다. 그에게 한번 방문해 보고 싶다는 의향을 전했고 북한 외무성이 이를 허락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평양 숙소에서 여장을 푼 뒤 베이징발 BBC방송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는 지난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을 맡고 있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와 함께 방북을 추진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포기한 적이 있다. 이번 방북은 그때 계획의 연장이었다. 다만 그레그 전 대사는 동행하지 않았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나.

“미사일 문제에 대해 김계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는 주권의 문제이며 군사적 훈련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미 간 미사일 모라토리엄(발사 유예) 협정은 유효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자세한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매우 상반된 이야기도 들었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원하고 6자회담의 진전도 바란다고 했다.”

미사일 발사에 관한 김 부상의 얘기는 다음 날 외무성 대변인이 발표한 내용과 대동소이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강행한 당일 오전 김 부상을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 이근 외무성 미국국장 등을 면담했다. 그는 “매우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장시간 동안 그들과 면담했고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고 전했다. 미사일 문제도 김 부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미사일 발사 직후 북한 표정은 어땠나.

“보통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북한 외무성도 미사일 발사를 사전에 알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발사 5시간 전 나와 일행의 방북을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이 왜 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고 보는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벼랑 끝 정책일 수도 있고, 이란과 이라크에 쏠린 세계의 관심을 북한 쪽으로 모으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또는 선군(先軍) 정책의 하나일 수도 있다. 정답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근 북한에서 나오고 있는 상반된 메시지들에 대해 당혹스러움(perplexed)마저 느끼고 있다. 정책이 조율돼 나온다는 인상을 받을 수가 없다. 북한 권력 층 내의 불안정성(instability)을 느낀다.”

혹시 김정일 정권의 붕괴 조짐 같은 것을 느꼈다는 이야기인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웠다. 그가 지난해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해왔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틀 뒤인 13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을 만나 “어떻게든 북한의 붕괴를 저지하면서 정책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도 북한이 붕괴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80년대 외상을 지낸 아베 장관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사망)와 교분이 있다. 그러나 단순히 선대와의 인연 때문만이 아니라 평양 베이징 방문을 마친 직후 바로 차기 총리 ‘0 순위’로 꼽히는 아베 장관을 그가 만난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야기 현 세미나에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 문제도 피랍 일본인 처리 방식처럼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2년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피랍 일본인 문제 해결을 촉구하자 김 위원장이 ‘아랫사람’들의 잘못이라며 책임을 인정한 것처럼 위조지폐 문제도 그런 방식으로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재무부가 수집한 증거를 북한에 주고 북한 당국이 자체 조사하도록 한 뒤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자는 얘기다.

혹시 북한 측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전하는 메시지인가 싶어 “북한의 자체적 위조지폐 조사 방안을 놓고 평양 당국자들과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스칼라피노 교수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북한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지만 이 제안이 제시된다면 수용하길 바란다”고 여운을 남겼다.

도쿄의 한 외교소식통은 “스칼라피노 교수가 국무부에 방북 보고서를 내지는 않겠지만 주일 미국대사관에 들러 김계관 부상 등과의 면담 내용을 전해 주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만약 북한이 뭔가 메시지를 전했다면 그런 경로를 통해 전달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칼라피노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도 그렇지만 최근의 한반도 정세를 두고 한국 사회는 심각한 이념 갈등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한반도 문제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류 정책(contact policy)은 지속돼야 하지만 결코 (북한의 실체에 대해) 나이브(naive)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북한은 너무나 다른 곳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순조롭게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임을 알아야 한다.” ‘나이브’하다는 그의 말은 아마추어적이라거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뜻이다.

미야기=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스칼라피노 교수는…▼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미국 내 동아시아 문제의 최고 권위자로 불려 왔다. 반 세기가 넘는 그의 학술 및 연구 활동 때문이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특히 한국인들에게 ‘코뮤니즘 인 코리아(Communism in Korea)’의 공저자로 유명하다.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2년 발간한 이 책은 14년 뒤인 1986년 한국에서 ‘한국공산주의운동사’(돌베개 인문과학신서)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다.

그는 1948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정치학 교수로, 1990년부터는 이 대학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 총 38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냈다. 대부분이 중국 한국 일본에 관한 것이고, 이 대학에 동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한 사람도 스칼라피노 교수다.

그의 80세 생일 때 로버트 버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총장은 “스칼라피노 교수는 우리 대학뿐 아니라 미국 학계의 큰 자산”이라며 “그는 특히 아시아의 중요성에 눈을 뜬 미국 전후 세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한미 양국 대통령에게 지역 현안을 브리핑할 만큼 정책 결정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미국 대통령 3명의 동아시아 정책 고문 역할 외에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 정책 담당자의 조언자로도 활동했다. 그가 1959년 미 상원에 제출한 한국보고서를 통해 5·16군사정변을 예견한 일은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지난해 한 언론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이 동북아의 균형자가 되려면 선결 조건으로 “한국 내에서 정치적 성숙, 경제성장의 지속을 이뤄내야 한다”며 “멀리 있어 침략 위협이 없는 미국과 전략적 동맹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1989년 첫 방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평양을 방문했다.

미야기=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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