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자회담에 조건 없이, 유보 없이 들어와야 한다.”(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
백 외무상과 라이스 장관은 2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6자회담 재개의 조건을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이날 쿠알라룸푸르에서 ARF와는 별도로 열린 10개국 외교장관 회담에선 북한의 미사일 추가 발사를 막기 위해 압박과 대화를 병행하자는 의견이 개진됐다.
▽냉기 도는 북-미 관계=이날 오전 ARF에 참석한 백 외무상과 라이스 장관 사이에선 냉기가 돌았다. 두 사람은 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라이스 장관은 북한이 시험 발사한 미사일을 ‘미국의 영토에 도달할 수 있는 위협’으로 규정한 뒤 “동아시아의 번영과 민주주의에 결정적 장애가 되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문에 담긴 대북 제재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백 외무상은 “미사일 발사는 자력 방위를 위한 통상적인 군사훈련”이라며 “ARF에서 우리를 비난하는 성명이 나오면 우리는 계속 ARF에 남아 있을지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은 한국과 군사훈련을 하고 조선(북한)을 상대로 무기를 배치하면서 미사일 훈련을 하고 있다. 미국이 하면 합법이고 우리가 하면 불법이냐”고 따졌다.
백 외무상은 “선제타격론이 나오는데 상황이 상당히 엄중하다”며 일본의 ‘대북 선제공격론’을 염두에 둔 듯한 얘기도 했다. 그러나 아소 다로(麻生太郞) 일본 외상은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거론하며 북한 인권문제로 화살을 돌렸다.
이에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이 “(대북) 제재를 거론하는 것보다 외교를 통한 해결이 중요하다”며 진화에 나섰으나 백 외무상의 기분은 풀리지 않았다.
그는 ARF 회담장을 빠져나오면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오후에 말레이시아와 회담이 잡혀 있다”는 북측 관계자의 보고에 “나 안 해”라고 화를 내기도 했다.
북한은 이날 오후 ARF 의장국인 말레이시아와의 양자회담에서 “ARF 회원 25개국이 만장일치로 동의하지 않는 의장성명 채택을 용납할 수 없다”며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우려를 나타내는 의장성명 채택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다.
▽11자회담 끝내 거부한 북한=이날 북-중 외교장관 회담에서 리 외교부장은 10자회담 참석 시간을 늦춰가면서까지 1시간 반 동안 백 외무상에게 11자회담 참석을 설득했으나 끝내 거절당했다.
회담이 시작되자마자 리 부장은 “여기서 만나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 기자들도 많다”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백 외무상은 “촬영하는 사람들을 다 나가게 해달라”고 말을 끊었다.
10자회담에서 라이스 장관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는 북핵 문제와 무관하게 북한의 불법행위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며 북한의 금융제재 철회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10자회담은 각국 외교장관들이 의견 개진을 한 뒤 성명이나 결의문을 채택하지 않고 끝났다. 정부 당국자는 “10자회담을 다시 열자거나 정례화하자는 논의는 없었다”고 밝혔다.
▽미국 특사 파견?=ARF에 참석한 국가들 사이에선 미국이 평양에 전직 대통령이나 그에 준하는 전직 고위급 인사를 특사로 파견해 문제를 푸는 게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미국이 6자회담과는 무관한 인사를 북측에 보낼지 모른다는 관측도 나온다. 북-미 양자협의는 6자회담의 틀 안에서만 하겠다는 게 미국의 원칙이기 때문. 외교 소식통은 “미국 일각에서도 북한에 특사를 보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쿠알라룸푸르=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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