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주요 당국자들이 사석에서 밝히는 솔직한 심정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번에 왜 미국에 오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6자회담은 북한이 응해야 열릴 것이고, 전시작전권은 한국이 원하는 대로 줄 것이며, FTA 협상은 실무진에서 논의하는 중인데 대통령끼리 새로 얘기할 주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가 이번 정상회담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회담의 내용보다는 한미 관계가 건재하다는 것을 국민에게 재확인시키는 일일 것이다.
국내에서 갈수록 거세지고 있는 전시작전권 이양 논의 중단 요구에 ‘그대로 추진’ 의지를 밀어붙이는 동시에, 한미 양국 간 신뢰에 문제가 없으니 한국 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원도 보장된다는 메시지를 부각시키려는 복안이다. 북한 변수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시점에 한국에 미칠 군사 경제적 파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미국이 한국 정부의 제안에 장단 맞추는 것을 마치 한미 관계의 협력적 분위기로 호도하려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한국이 먼저 요구해 온 전시작전권 이양에 응하되 신속하고도 확실한 처신을 통해 명분도 실익도 얻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지, 한국이 앞으로 겪게 될 각종 걱정거리를 대신 떠맡겠다는 뜻은 아니다.
신중한 논의 없이 덥석 제기해 놓고 의외로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오니까 어차피 상대방이 원했던 것이라고 둘러대서는 안 된다. 미국은 자기 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결코 한국을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그간 용감한 반미를 불사해 왔고 급기야는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한미 관계를 재조정하게끔 만든 셈이다. 미국이 볼 때 한국은 중요한 나라이지만 세계 전역에 걸쳐 관리하는 여러 동맹국 중 하나일 뿐이다. 한국이야말로 한미 동맹 없는 어떤 대안도 찾지 못할 처지 아닌가. 한미 간 기본적인 신뢰 관계마저 무너뜨려 가면서 “역대 그 어느 정권에서 이만큼 당당하게 미국과 협상한 적이 있느냐”고 떠벌릴 것인가.
제 살을 깎아 먹는 자주외교 말고도 한미 관계를 겉돌게 하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정부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에 있다. 북핵 반대, 북한의 인권 문제 중시, 국제 불법 행위 근절 등의 원칙에는 입으로만 동의하고 실제로 미국과의 정책 공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노 대통령은 2003년 취임 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연 첫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외교 경제적 압박을 통한 ‘추가적 조치’에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해 놓고도 이를 저버렸다. 한국 정부의 맹목적인 대북 지원이 북한 당국의 벼랑 끝 전술에 힘을 실어 주어 사태를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이 미 정부의 인식이다. 북한은 온갖 핑계를 대며 핵 동결을 거부했고 미사일까지 쏘는데도 우리의 지도자는 미국이 너무 쏘아붙여서 북한이 불안해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 국민이 감지하는 한미 관계의 적신호를 우리 대통령은 제대로 보고 있을까. 한미 관계가 나쁘다는 것을 국가의 지도자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 바로 한미 관계를 끊임없이 겉돌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노 대통령은 지난주 루마니아에서 열었던 교민간담회에서 약효가 그리 길게 가지는 않지만 자신이 부시 대통령을 만나면 한미 관계는 한동안 조용해지곤 했으며, 이번에도 양국 관계를 탈 없이 조정하겠다고 했다. 한미 관계의 무엇이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그저 눈앞에 닥친 현안에 대한 이견만 조율하겠다는 안이한 사고가 배어 있다. 국가전략 자체가 잘못돼 있으면 제 아무리 미국의 대통령과 회담한다 해도 알맹이가 빠진 인사치레만 반복할 뿐이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