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외교적 설득 노력을 사실상 포기함에 따라 대북 제재보다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는 한국 정부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미국 대북 압박으로 상황 관리”=미국이 7월 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렸던 10개국 외교장관 회담에 이어 유엔 총회에서 또다시 다자회담을 추진하는 데는 북한의 고립을 심화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유엔 회원국 다수가 대북 제재 조치에 동참하도록 해 대북 압박을 가중시키려는 목적도 있다는 것.
6자회담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12일 방한 일정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유엔의 모든 회원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문을 이행해야 하며 그렇게 되도록 지켜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은 미국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 중국은 다자회담 개최에 대한 분명한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으나 미국이 밀어붙일 경우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한국 정부의 판단이다.
중국도 6자회담이 장기간 공전하는 상태에서 북핵 문제를 논의할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한국은 다자회담의 효용성에 의문을 품고 있지만 중국과 비슷한 이유로 반대는 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처럼 누구도 명시적인 반대를 못하는 상황이라 9월 말 또는 10월 초 유엔 총회에서 다자회담이 열릴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참여 국가 및 개최 시기가 일정치 않은 다자회담이 6자회담처럼 정례적으로 되기는 힘들기 때문에 미국이 계속 다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를 다뤄 나가려고 할 가능성은 낮다.
한국 정부 관계자는 “북한을 상대로 외교적 노력은 할 만큼 다했다는 게 미국의 생각”이라며 “미국은 앞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압박 정책을 통해 북한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선에서 관리해 나가려고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미 갈등 정상회담으로?=정부 당국자는 12일 브리핑에서 “제재가 만병통치는 아니다. 외교를 통해 북한이 어떻게 하면 제재를 안 받고, 핵을 포기하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기다리는지 이해하도록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이 북한을 설득하기보다 대북 압박 정책을 강화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데 분명한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힐 차관보가 제안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의 양자회동에 북한이 응하지 않은 이상 외교를 통한 대북 설득에 더는 의미를 두기 힘들다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힐 차관보와 정부 고위 당국자들은 11일 면담에서 이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분위기는 14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으로 그대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
특히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 조치 등 대북 금융제재를 주도하고 있는 헨리 폴슨 미 재무부 장관이 노무현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한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폴슨 장관이 13일 노 대통령을 면담한 자리에서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문제와 함께 대북 제재 방안을 거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한 당국자는 “면담 과정에서 북한 위폐 문제가 자연스럽게 나올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면담 목적은 국제금융 환경과 한국의 금융개방 등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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