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경원]외교 아는 개미는 코끼리 틈에서도 산다

  • 입력 2006년 9월 18일 02시 56분


미국 예일대의 폴 케네디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15일자)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상황을 코끼리에게 둘러싸인 개미에 비유했다. 그럴듯한 비유다. 한반도를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새우는 고래싸움에 즉시 죽어 버리지만 개미는 코끼리들에게 둘러싸여서도 살아날 전략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 좋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훌륭한 생존전략은 어떤 것일까? 케네디 교수는 구체적인 전략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저서 ‘강대국의 흥망’에서 강대국이 몰락하는 원인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케네디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어떤 강대국도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과다한 재정 지출을 하게 되면 경제가 쇠약해지게 되고 종국에 가서는 군사력도 쇠약해짐으로써 몰락한다는 것이다.

과다한 재정지출로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력 쇠퇴와 몰락이 불가피하게 된 가장 가까운 예로는 북한이 있다. 북한은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몰락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실패한 국가’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있다.

북한의 앞날에는 오로지 시간문제만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북전략은 북한체제가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 지속되는 가능성과 그와 반대로 북한 상황이 ‘현상’ 타파의 방향으로 급변하게 될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해 두어야 한다.

케네디 교수는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지정학적 변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한반도 문제의 지정학적 성격에 대해서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한국은 “정신 바짝 차리고” 외교력을 길러야 한다는 조언은 우리가 정말 받아들여야 한다.

외교력은 무엇인가? 외교력은 외교적 수단으로 국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정치외교는 군사력의 균형을 반영한다고 한다. 단순히 반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변화를 불러오기도 한다. 따라서 외교력은 군사력을 보완할 수 있다. 비결은 바로 설득력이다. 설득력의 비결은 상대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이질적 문화를 내부로부터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문화, 다민족, 다인종 등의 다원적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협상이라는 진리를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는 것 같다. 동남아 사람을 보면 동북아 사람보다 훨씬 더 외교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바로 그들의 다원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4대 강국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관리하지 못하면 또다시 처참한 비극을 반복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코끼리에게 둘러싸인 개미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개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코끼리와 힘겨루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코끼리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설교하는 것도 아니다. 국제관계는 어떤 윤리나 도덕을 위한 강연도 세미나도 아니다. 국제사회에서는 모든 국가가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 자국에 긴요한 이익을 스스로 보호하는 길밖에 없다.

국제관계는 현실이다. 우리나라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도 무시해선 안 되는 현실이다. 물론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이 지역에서 앞으로 균형자 역할을 하고 싶은 충동도 느끼고 이미 5대 강국의 하나라는 환상에도 빠져 본다. 그리고 북한이 더는 위협의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설득해 보기도 하고 우리나라 경제 규모가 이미 세계에서 몇 번째로 큰 규모인데 하는 통계에 매달려도 본다.

그러나 지정학적 현실은 일방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경제가 세계에서는 몇 등 안에 들었다 해도 한반도가 놓여 있는 동북아에는 세계의 가장 큰 나라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국은 작게 보일 수밖에 없고, 균형자 역할은 다른 국가들이 한국을 지역의 균형자로 인정해 주어야 가능하다. 외교력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과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의 생각을 그들의 관점에서, 있는 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현 시점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코끼리들의 모든 것을 깊이 있게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강대국 정치에 무관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를 위해 주변에 살고 있는 코끼리들의 생리와 성격 및 그들의 활동 형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대응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전략도 없이 무턱대고 용감하게 나서는 자는 후회할 수밖에 없다. 외교에서는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외교는 조용히 자신을 연마하고 세련되게 만들어 갈 줄 안다. 매일 매일 세계를 시끄럽게 만드는 뉴스는 긴 역사의 안목으로 처리하면 된다.

한반도의 독특한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더 외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그 운명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유능한 외교의 인적 자원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개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전 주미대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