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은 일본 쪽이 더 적극적이다. 추석 연휴에라도 한국에 오겠다고 하고, 그 전후에 중국까지 방문하겠다는 걸 보면 일본의 조바심이 읽힌다.
한국의 속사정도 다를 게 없다. 고이즈미 전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때문에 한일관계가 꼬일 대로 꼬였지만 언제까지 떠나 버린 총리만 탓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신임 총리와 만나 국면 전환을 해 보고 싶다는 우리의 희망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양국 정상이 만나기 전에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지난해 11월 이후 얼굴 맞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긴 하다. 하지만 신임 총리와 만나서도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면 차라리 만나지 않느니만 못했다는 비난이 나올 게 뻔하다. 노 대통령은 고이즈미 전 총리와 8번이나 만났다. 정상들이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만나서 어떤 성과를 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을 자신의 입지 강화에만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내정에선 성공했다. 그러나 한중 외교에는 명백히 실패했다. 아베 총리로서는 한중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정권 초기부터 고이즈미 전 총리와 차별화하고, 외교에 강한 총리라는 이미지를 굳히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정상회담은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다.
정상회담을 하면 그 결과를 내정에도 적극 반영해야 한다. 아베 정권은 내년 7월 참의원 선거 때까지는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선거에 맞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현재로선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은 적다. 그렇지만 예상보다 더 큰 참패를 당한다면 아베 정권은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아베 총리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우익세력을 결집하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한국과 중국이 반발할 만한 정책들도 강하게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만약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의 정신이나 합의를 외면하고, 정상회담을 했다는 사실만을 내정에 이용하려 든다면 한일 간의 고랑은 더 깊어질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일본 총리=일본’이라는 도식은 버려야 한다. 총리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일본의 전부는 아니다. 고이즈미 전 총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고이즈미 총리를 버리면서, 버리지 말아야 할 많은 것도 함께 버리는 잘못을 저질렀다. 아베 총리도 틀림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인이나 국익까지도 감정적으로 쉽사리 포기해선 안 된다. 총리만 보면 일본을 놓친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한일관계를 재단하는 일도 사라져야 한다. 며칠 전 한 일본 언론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한국은 관계 개선의 조건으로 총리가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선 안 된다고 요구한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 측에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만나 본 유력 일본 정치인들은 이렇게 말한다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일본 정계의 불신감이 대단히 크다. 대통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많이 한다. 안보문제에 공통의 가치관이 없다는 것도 큰 문제다.” 한국이 일본의 신뢰를 잃게 된 데는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늦긴 했지만 외교전문가에게 협상의 여지를 줘야 한다. 최종 결정은 대통령이 하지만, 대통령이 북도 치고 장구도 쳐서는 안 되는 게 외교의 기본이다.
양국은 북한 문제로 갈등을 빚을 가능성도 크다. 어느 정치학자는 북한 때문에 빚어진 한미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이 북한에 더 유화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국은 이해해야 하고, 미국이 북한에 더 강경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한국은 이해해야 한다.” 이는 한일 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다.
한일정상회담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시작일 뿐이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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