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와 동아시아의 번영’이라는 주제로 열린 세미나에서 한국 측 인사들은 한 중국 학자의 발언에 귀를 의심했다.
이 학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과 한국 정부 사이에 ‘핫라인’을 설치하자”고 제의했다. 핫라인을 설치해야 할 정도로 우려할 만한 사태가 무엇이냐는 한국 측 질문에 그는 ‘북한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예로 들었다.
한국은 북한 붕괴를 ‘멀고도 먼 미래의 일’로 느끼지만 중국은 이미 ‘곧 닥칠 수 있는 현실’로 생각하는 것이다.
유엔의 대북(對北) 제재 결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도 중국의 이런 태도는 그대로 드러났다.
중국은 유엔 결의를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말하면서도 기회만 있으면 유엔의 제재가 북한의 안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제재의 목적이 한반도 비핵화이지 북한 정권의 붕괴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제재를 얘기하지만 강조의 방점은 여전히 북한의 정권 붕괴 방지에 있다.
북한이 갑자기 붕괴한다면 그것은 중국으로서는 악몽이다. 그들이 즐겨 쓰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표현처럼 중요한 완충지대가 사라지는 셈이다.
중국은 제재에 동참하더라도 절대로 북한 정권의 붕괴를 몰고 올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원유의 공급이나 식량 원조를 완전히 끊는 것은 고려 대상도 아니다. 북핵 문제에 관한 중국 정부의 3대 원칙은 한반도의 안정과 비핵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로서 비핵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의 안정이다.
중국의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북핵 문제로 붕괴하지 않더라도 10∼15년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북한을 가 본 인사들은 북한 정부가 이미 통치 능력을 잃어 가고 있다고 전한다.
설령 이런 예측이 맞지 않을지라도 북한의 붕괴는 어느 순간 갑자기 올 수 있다.
독일의 통일은 10년 전은 물론 1년 전에도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1989년 여름부터 시작된 동독인의 엑소더스(대탈출·구약성서의 ‘출애굽기’를 가리키는 말)는 반년도 지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기자에게는 아직도 상반된 두 장면이 기억에 선하다.
하나는 10년 전 최덕근 영사 살해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버스정류장 사무실 수리 현장에서 만난 북한 건설노동자 세 명은 남한 동포가 주는 용돈을 한사코 사양했다. 30분이나 ‘실랑이’를 벌인 끝에야 돈을 줄 수 있었다. 옷차림은 꾀죄죄했지만 나름의 자존심을 읽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올해 추석 전날 중국 단둥(丹東)의 접경지역에서 북한 병사를 만났을 때다. 폭 2m도 채 안 되는 개울을 두고 국경선을 마주한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어디서 왔나’라고 묻더니 ‘서울’이라고 대답하자 다짜고짜 ‘돈 좀 주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체면이고 뭐고 없는 것이다.
겉으로는 예전과 비슷해 보여도 북한의 속 모습은 이처럼 크게 달라지고 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북한의 붕괴를 정부가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의 붕괴가 분단국가의 설움을 씻어 내는 한민족의 통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한다. 북한에서 큰 동란이 일어나거나 정권이 붕괴했는데도 한국 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중국은 북한 내 자국민 보호와 난민 방지를 위해 군대를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철저히 준비하지 않으면 북한이 붕괴하더라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
우리 모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다.
하종대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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