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01년 1월 17일 체결한 한미 미사일협정과 그해 3월 26일 정식 가입한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에 따라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없다. 그러나 크루즈미사일은 이런 제한을 받지 않는 ‘틈새’다. 그래서 정부는 북한과의 미사일 전력(戰力) 격차를 줄이기 위해 1990년대 초부터 크루즈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해 왔다. 국방부와 국방과학연구소(ADD)의 노고가 많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이 영 개운하지 않다. 주변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야말로 쉬쉬하며 개발해 온 전략미사일의 존재를 굳이 북의 핵실험 직후에 덜컥 공개한 이유가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공개도 국방부나 ADD가 공식 발표한 게 아니라 정부 모처에서 언론에 슬쩍 흘린 것으로 알려졌다. 북의 핵실험으로 국민의 안보 불안감이 커져 가니까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 주려는 의도였겠지만 그렇다고 안도할 수가 없다.
사거리가 1000km로 늘었으면 뭐 하나. 북의 핵무기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재래식 무기와 핵무기의 비(非)대칭성 때문이다. 첨단 재래식 무기가 아무리 많더라도 핵무기에 의한 선제공격을 억지(抑止)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핵 공격을 할 경우 이쪽도 즉각 핵으로 보복할 수 있어야 억지와 균형이 가능하다.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이를 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 크루즈미사일의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첩보위성을 비롯한 첨단정보력으로 북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면 그 효용은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목표물을 적시에 정확하게 때릴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첨단정보장비의 도움은 결국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기정사실로 굳히는 바람에 한미연합사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핵이나 미사일 등 전략무기는 상대국으로 하여금 그 존재 여부를 확신할 수 없도록 할 때 효과가 더 큰 법이다. 한국이 크루즈미사일을 가졌는지, 안 가졌는지 알 수 없을 때 북이나 주변국들은 더 두려움을 갖게 되고 그만큼 억지효과가 생긴다. 이번 미사일 공개는 이처럼 초보적인 ‘모호성의 원칙’을 스스로 깨 버렸다.
북이 핵실험으로 ‘장군’ 했다고 해서 우리 정부가 굳이 감춰 둔 미사일까지 공개하며 ‘멍군’ 한 것은 전략적 차원에서 현명한 대응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평소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전략적인 물리력은 가져야 한다”고 말해 왔다. 이번 크루즈미사일도 그중 하나였을 개연성이 높다. 어차피 북의 핵 위협을 상쇄하지 못할 무기라면 ‘비장(秘藏)의 그 무엇’으로 계속 감춰 두는 게 나았다. 공연히 주변국들의 경계심만 키워 놓고 말았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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