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北 제재 김빼기 작전’ 경계령

  • 입력 2006년 11월 2일 02시 56분


■“낙관 이르다” 신중론

미국과 북한이 중국 베이징(北京) 비밀 접촉을 통해 6자회담 재개에 합의한 지난달 31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기쁜 소식”이라며 환영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선임보좌관 출신인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도 “북한이 그동안 회담 재개 선결 요건으로 주장해 온 금융제재 해제를 요구하지 않았다”며 조심스럽게 북한의 태도 변화에 무게를 뒀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내부 기류는 좀 달랐다.

백악관 사정에 정통한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이날 “미국에서 비둘기파(협상파)가 힘을 얻고 있다거나 대북 제재의 필요성이 줄어든 것 아니냐, 또는 북한이 이번엔 좀 다른 것 같다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론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 “6자회담 위해서도 제재는 필요”

역설적이지만 미국은 가까스로 만들어 놓은 대북 제재 구도를 깨지 않기 위해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에 가깝다. 익명을 요구한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북한이 6자회담 테이블에 돌아오겠다고 하는 마당에 미국이 그걸 거부하면 중국과 한국이 미국을 비난하게 된다”며 “그렇게 되면 대북 제재 대오까지 흐트러지게 되는데 미국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6자회담 미국 측 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도 베이징 비밀 접촉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에게 ‘유엔 결의는 그대로 간다. 그건 우리의 토의 주제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6자회담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유엔 제재는 병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백악관 내부에서는 6자회담을 재개하긴 하지만 실질적인 협상은 북한이 경제 제재로 ‘쓴맛’을 본 뒤에나 가능하다는 믿음이 강하다. 워싱턴의 또 다른 소식통은 “채찍 대신 당근을 쓰려고 해도 당나귀가 사흘은 굶어야 한다. 그래야 먹는다”고 비유했다.

○ 북-미 동상이몽, 서로가 ‘시간벌기’

하지만 부시 행정부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의도를 ‘김 빼기 겸 시간벌기’로 이해한다. 북한은 6자회담이 재개되면 종전과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다 다분히 선언적인 내용의 ‘언론 발표문’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내년 상반기쯤으로 다음 회담 일정이 잡히면 국제사회의 제재도 분산되고 김이 빠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계산했을 것이라는 게 미국의 판단이다. 이렇게 되면 북한은 또다시 플루토늄을 추출하고 추가 핵실험 준비에 나설 수 있다.

물론 시간벌기로 말하면 부시 행정부도 북한과 비슷한 처지다. 부시 행정부는 7일(미국 시간) 상·하원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민주당이 최소한 하원은 탈환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부시 행정부로서는 악재를 하나라도 줄여야 할 판이다.

일본 게이오(慶應)대의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교수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6자회담 재개 합의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점수를 얻으려는 부시 행정부와 중국의 체면을 더는 깎을 수 없는 북한 지도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이뤄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 현격한 기대치 차이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회담 재개 직후 미국과 북한의 기조연설문에서 협상의 운명이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회담장에 나와서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난해 합의한 9·19공동성명 이행 방안을 논의하자’고 나서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는 태도다. 힐 차관보도 베이징 접촉에서 “최근 몇 주, 몇 달 사이의 일들로 인해 9·19공동성명 이행 노력이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며 “(공동성명의) 핵심은 비핵화”라고 못 박았다. ‘몇 주간의 일’은 북한의 핵실험을, ‘몇 달 사이의 일’은 미사일 시험발사를 말한다.

미국은 회담이 재개되면 북한에 △핵실험 포기선언 △플루토늄 및 우라늄 핵시설의 위치 정보 공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의 영변 핵재처리시설 재입국 허용을 요구한다는 구체적인 구상을 갖고 있다.

북한도 회담장에서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서 ‘적절한 대접’을 해 달라는 격상된 요구를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이 높다.

○ 중국 태도 변화 가능성

부시 행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의 역할에 감사를 표한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베이징 3자 접촉에서 북한의 6자회담 복귀 선언이 나온 뒤에도 이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중국이 대북 제재 공조 대오에서 이탈하려는 기류가 감지된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중국이 가까스로 6자회담 재개 국면을 만들어 놓긴 했지만 앞으로도 대북 제재 전선의 선봉에 계속 서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한 소식통은 “중국은 북한의 비핵화도 추구하지만 한반도의 정세 불안과 대규모 탈북 사태를 일으킬 강경 제재 구도의 지속은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지금은 유엔의 제재 결의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지만 북한을 사실상의(de facto) 핵국가로 인정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고 분석했다.

워싱턴=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南 “할일이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앞으로 재개될 6자회담에서 제한적인 역할밖에 못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북한을 설득할 아이디어를 미국과 중국에 제공했지만 실제 6자회담 재개를 위한 논의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현실이 회담이 열려도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6자회담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의 핵 폐기. 하지만 6자회담을 1년 가까이 공전시켜 온 대북 금융제재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핵 폐기라는 본질적 문제를 논의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문제 역시 북-미 양자 접촉에서 풀어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반면, 6자회담의 진전 여하에 따라서는 실질적으로 북-미가 논의한 사항에 대한 뒷받침만 해주는 처지가 될 수도 있다.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했으니 대북 지원을 계속하라는 노골적인 요구를 해올 수 있고, 미국도 경우에 따라서는 대북 전력공급 등의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할이 이처럼 제한적,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이 이미 세워진 로드맵에 따라 핵 보유를 위한 절차를 하나씩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6자회담 복귀 결정 역시 국제사회의 압박을 피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해 정해 놓은 수순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안팎에서도 북한이 미국 중국과 6자회담에 참여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북한이 핵 보유 의사를 포기할지에 대해 의심하는 시각이 많다.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는 “6자회담에서 북한이 핵 폐기 의사가 있다는 말을 꺼낼지 모르나 미국은 이를 행동으로 보일 것을 요구할 것이고 북한은 이를 거부해 회담은 난항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北 “실리 챙기자”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결정했지만 북한의 행보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북한이 9·19공동성명 이행 등 실질적인 조치에 나서기보다는 금융제재 해제 등 실익만 챙기려 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의 중재로 6자회담에 복귀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껄끄러워진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해 중국의 경제협력과 지원을 유지할 수 있는 이득을 얻었다는 평가다. 또 6자회담 복귀를 통해 남측에 중단된 쌀 비료 지원 재개와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 유지를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했다고 판단할 가능성도 높다.

2차 핵실험을 강행하기보다 6자회담에 복귀해 핵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줬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를 피하려는 의도도 있는 듯하다.

정부 당국자는 1일 “전례로 볼 때 핵실험을 통해 핵 보유를 과시한 북한이 6자회담 재개를 모색하는 등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로 나올 것은 예상됐던 수순”이라고 말했다.

북한이 이번 6자회담을 통해 핵 폐기 등 실질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특히 북한이 1일 외무성 발표를 통해 금융제재 해결이 6자회담 복귀의 전제였다고 주장한 것은 북한의 향후 행보를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다. 6자회담 복귀의 ‘조건’을 미리 내세움으로써 나중에 미국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6자회담을 중단할 수 있는 소지를 남겨 놓고, 그 책임을 미국에 돌리려는 의도 아니냐는 지적이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6자회담을 통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를 늦추고 대북제재에 대해 견해 차를 보이는 한중과 미일 공조를 흐트러뜨리는 효과를 얻으려 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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