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핵실험을 했지만) 한반도에서 (남북 간) 군사적 균형이 현재로는 깨지지 않았다.”(2일 외국인 투자유치 보고회)
북한 핵실험 직후 대북 포용정책 재검토를 시사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 ‘도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핵실험 이후 노 대통령의 대북관은 차차 포용정책을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하더니 2일에는 ‘북한 핵실험에도 군사적 균형은 깨지지 않았다’는 일반의 인식과는 동떨어진 발언을 했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이 많은 전임 대통령이 그랬듯이 임기 말 ‘인의 장막’에 갇혀 현실 인식과 판단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인의 장막’에 갇혔나=북한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군사적 균형은 이미 깨졌다는 게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38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한국 측이 미국의 핵우산 공약 구체화를 요구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것.
노 대통령의 발언이 외국인 투자유치 보고회 자리에서 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무리한 발언이라는 지적이다. 한 군사전문가는 “북한 핵실험은 남북의 전력이 비대칭적임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대사도 2일 국민대 개교 60주년 기념 특강에서 “북한은 핵을 개발함으로써 한국과 지역 내 잠재적 위협을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노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이 설마 남한에 핵무기를 사용하겠느냐’는 기존의 안이한 북핵관의 연장선에서 나왔다는 게 정부 내 분석이다. 이 같은 현실 인식은 대통령 주변의 의사전달 통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인의 장막’에 갇혀 입맛에 맞게 가공된 정보만 보고받는 바람에 여론의 흐름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노 대통령이 철저히 ‘코드형’ 외교안보라인 진영을 짠 데서도 이 같은 기류를 엿볼 수 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 최근 노 대통령의 ‘코드인사’를 공개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진 것도 이 때문이다. 박기춘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비서실장은 “(청와대가) 믿음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인사를 쓰라는 국민의 공감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기 말 증후군=김영삼 정부 시절 1996년 말 시중의 여론을 읽지 못하고 ‘노동법 날치기’를 강행한 것, 김대중 대통령이 임기 말 아들들의 비리의혹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 등이 ‘인의 장막’에 가려 민심을 읽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로 꼽힌다.
청와대에 근무했던 한 인사는 “임기 말이 되면 대통령은 ‘임기 말이라 나를 우습게 보나’라는 생각에 민감해진다. 그런 대통령에게 시중의 비판여론을 그대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지친 대통령도 맘이 편한 사람을 불러들이게 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여론과 정치권의 요구에 역주행하는 노 대통령의 행보가 여론에 한번 밀리면 더는 국정을 장악할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여권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임기 초에도 ‘역발상’으로 마이웨이를 고수했다”며 “원래 남의 말을 듣는 분이 아니다”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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