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해]‘대통령 불패(不敗)’라고 해놓고…

  • 입력 2006년 11월 8일 03시 00분


2002년 12월 30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돛을 올렸다. 노무현 캠프 사단인 교수와 핵심 참모들이 속속 서울로 모여들었다. 인수위는 서울에 연고가 없는 지방 출신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게 급선무였다. 서울시청 근처의 한 오래된 호텔에 장기 투숙하는 사람도 있었다.

참여정부 초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는 서울에 유학 온 대학생 아들이 사는 봉천동 아파트에 한때 머물렀다. 해양수산부 장관과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낸 허성관 광주과학기술원장은 2인1실 호텔을 쓰다가 불편해 아들 학교 근처 신촌 부근의 한 오피스텔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한때 친척 집에 있다가 청와대 주변에 집을 구했고, 최도술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은 청와대 직원 숙소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서울 명륜동에 있는 빌라를 처분했고, 김병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도 강남과 동떨어진 구기동 북악산 기슭의 한 빌라에 살고 있다. 이처럼 참여정부 사람들은 서울의 ‘강남 아파트’ 하고는 한참 거리가 멀다.

지방 출신 참모들이 서울에 거처를 구하면서 깜짝 놀란 것은 바로 서울 아파트 값이었다. 한 참모는 “부산보다 살기가 훨씬 불편한 서울의 아파트 값은 딱 지금의 반값이면 되는데 잘못 돼도 한참 잘못 됐다”고 말했다. 전국을 골고루 발전시키겠다는 지역균형 발전 방안도 인수위에서 큰 뼈대가 만들어진 작품이다.

노 대통령은 취임 후 ‘투기세력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2003년 가을 노 대통령은 “강남불패(不敗), 강남불패 하는데, 그러면 대통령도 불패다”라며 강남 집값과의 전면전에 나섰다. 부동산 시장이 꿈틀거릴수록 대통령 발언은 더욱 강경해졌다. “투기와의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부동산 정책에 올인(다걸기)하겠다”….

하지만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서울 아파트 값은 3년 반 동안 평균 35.9%나 급등했다. 대통령 말을 믿고 부동산 값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수많은 무주택 서민들은 정책 실패의 최대 피해자가 됐다. 대통령과 대통령정책실장, 경제부총리, 건설교통부 장관의 말을 듣지 않고 청개구리 식 투자를 한 사람들이 ‘신흥 부유층’으로 떠오르고 있는 게 기막힌 현실이다.

열정만 있을 뿐 시장 논리를 무시한 부동산 정책의 결과는 아마추어리즘이 초래한 재앙(災殃)에 가깝다. 모르핀 주사 놓듯이 대책을 남발했지만 시장의 내성(耐性)만 키웠을 뿐이다.

균형 발전을 명분으로 지방에 풀렸던 많은 돈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먹잇감을 찾고 있는 게 냉엄한 시장의 현실이다. 대통령은 퇴임 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고향에 내려가 맑은 공기 마시며 살겠지만 오로지 정부 말만 믿고 있다가 하루하루 삶이 팍팍해져 버린 서울에 남은 무주택자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누가 달래 줄 것인가.

대통령은 6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모든 정책적 역량을 집중해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제 정책 실험을 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린 지금 누가 대통령의 이 같은 ‘열정’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최영해 경제부 차장 yhchoi6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