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영훈]한국 현대사의 모순

  • 입력 2006년 11월 20일 03시 04분


모든 성공에는 실패를 부르는 모순적 인과가 내포되어 있다. 성공은 실패로 뒤집어지고 거꾸로 실패는 성공으로 일어서니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고 도는 법이다. 지난 60년의 건국사에서 대한민국은 비슷한 처지에서 출발한 다른 후진국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성공에는 실패를 예비하는 두 가지 치명적인 모순이 깃들어 왔다. 작금의 정치적 혼란을 보면서 모순의 임박한 폭발을 두려워한다.

하나는 몰이성의 민족주의이다. 민족이란 19세기까지의 한국인에겐 낯선 존재였다. 20세기 들어 일제의 차별을 받으면서 한국인이 발견한 가상의 운명공동체가 곧 민족이다. 일천한 역사나 천박한 가치에서 민족주의는 한국 사회를 선진 문명으로 이끌 능력이 없다.

1948년 건국 당시 국민의 대다수는 문맹에다 가난에 찌든 소농이었다. 신생 대한민국이 그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함에 있어서 민족만큼 손쉽고도 효율적인 것이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민족의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막았고 박정희 정부는 민족의 이름으로 조국근대화를 밀어붙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은 국민 통합의 순기능으로 작용하였다.

두 얼굴의 민족주의

민족이 건국사를 실패로 이끌지도 모를 모순으로 바뀐 것은 1980년대부터이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아직 잘 알지 못하나 이른바 민주화운동 세력에 의해 민족은 반미 통일운동의 깃발로 올려졌으며 그 깃발은 지금까지도 힘차게 펄럭인다.

원래 “통일의 열기가 가마솥처럼 끓어오르는데 남한의 지식인이 이에 올바로 부응하지 못한다면 결국 북한의 헤게모니를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라고 둘러앉으면 소곤거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집권세력의 일원으로 국가의 대사를 논하는 자리에 버젓이 앉아 있는 장면을 하루하루 보지 않을 수 없음이 오늘날 한국호의 기막힌 현실이다.

다른 한 가지 모순은 자유주의의 결여이다. 한국인이 근대 문명을 제 힘으로 이해하고 제 방식으로 기획하고 제 책임으로 실천하지 못했던 근대사의 비극에 궁극의 원인이 있다.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 문명은 가치보다는 제도로서 일본과 미국을 통해 이식됐다. 이식의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자유주의는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많은 경우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에 대한 불평과 고발을 의미할 뿐이었다.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는 무엇인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자유는 실은 속세에서 애써 모은 사유재산에 근거한다고 봄이 자유주의의 핵심 원리이다. 보통의 한국인은 사유재산이라 하면 무언가 뒤틀리고 역겨운 이미지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자유주의의 결여가 건강한 중산층에 기반을 둔 건강한 애국심의 결여로 이어지는 논리적 인과를 설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한국의 중산층은 고도성장의 개발시대에 대개 정치적으로 무임승차를 해 온 계층으로서 이미 가진 것에 전전긍긍하면서 정치적 발언과 실천에는 무척이나 소심한 집단적 특성을 보이고 있다.

얼마 전의 보도에 따르면 “전쟁이 나면 앞장서 싸우겠다”는 청소년이 10%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무슨 대책을 세운다는 이야기는 소문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어제는 북한의 김정일 씨로부터 “남조선이 경제성장을 했으나 결심만 하면 먹을 수 있다”는 기막힌 소리를 듣고 말았다.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집권 여당이 문을 닫겠다고 선언했다. 불과 2년 전의 그토록 화려했던 성공이 이처럼 어이없는 실패로 뒤집어진 것은 위와 같은 현대사의 두 가지 모순에 기초한 사상누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리 낙심할 필요는 없다. 막상 실패한 것은 그들을 지지한 대다수의 국민이고, 국민에게는 책임을 물을 방도가 없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실수할 가능성은 앞으로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렇게 알아서인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다. 역사는 풍부한 유산이기도 하지만 운명처럼 가혹한 족쇄이기도 한 법이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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