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헌에 따른 절차를 통해 결정하자는 말은 결국 전당대회를 열어 당의 진로를 결판내자는 것으로 통합신당파에 보내는 통첩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당과의 통합을 전제로 한 신당은 지역당 회귀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으니 전당대회에서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요구다.
노 대통령의 편지는 김근태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노 대통령을 ‘한 당원’으로 규정하며 신당 논의에서 빠질 것을 요구한 뒤 소속 의원 설문조사를 통해 통합신당 추진을 위한 세몰이에 나선 데 대한 반박의 성격이다.
허를 찔린 통합신당파는 대응을 자제했다. 그러나 물밑에선 “이제 대통령과는 끝났다”는 주장과 함께 통합신당파 의원 일부가 선도 탈당해 ‘제3지대’에서 통합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방안까지 거론되는 등 긴박한 모습이다.
○ 선도 탈당?
통합신당파가 주축인 당 지도부는 일단 노 대통령의 반격과 상관없이 설문조사 문항과 방법, 조사결과 공개 여부를 5일 오후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확정한 뒤 6일부터 설문조사를 강행하겠다는 태도다.
일단 세 확보에 주력하며 전당대회를 준비할지, 아니면 독자 행동에 나설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이 일전 불사 의사를 밝힌 만큼 통합신당파도 행동을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대통령의 태도로 볼 때 전당대회에서 당이 쪼개지더라도 세 대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 있다”며 “결별이 불가피하다면 통합신당파가 먼저 탈당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선도 탈당론이다. 이는 고건 전 국무총리가 추진하는 원탁회의 일정과도 관련이 있다. 고 전 총리는 12월 중하순경 중도개혁실용주의에 동의하는 모든 세력이 참여해 통합신당 창당을 위한 원탁회의를 구성하자고 제안해 놓은 상태다.
먼저 일부 의원이 탈당해 제3지대에서 고 전 총리와 민주당 및 다른 세력 등과 통합신당 추진을 위한 기반을 만들고 나머지 의원도 결국 신당 지지도 추이를 보며 단계적으로 합류한다는 수순이다.
그러나 현역 의원들이 불확실한 대선 국면에서 정치생명이 달린 탈당이란 카드를 던지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비상대책위원인 정장선 의원은 “노 대통령과 같은 하늘을 이고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신당파가 먼저 뛰쳐나가는 방안도 현 단계로선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조성식 의원은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선도탈당이나 분당은 쉽지 않다. 대통령의 발언은 유감이지만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장과 가까운 한 의원은 “현 상황에서 탈당은 명분이 없다”며 선도 탈당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았다. 통합신당파의 속내가 그만큼 복잡하다는 것이다.
○ 전당대회 카드
노 대통령이 이날 제시한 전당대회 카드는 친노 계열인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 등의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참정연 등은 의원들 사이에선 소수이지만 전당대회에서 붙으면 노선 투쟁에서 밀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듯하며 김 의장 등 비상대책위원회 해체와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당 노선 결정을 주장하고 있다.
통합신당파의 다수는 이에 부정적이다. 이들은 전당대회에서 당 해체, 민주당과의 통합 등의 문제를 ‘표결’을 통해 결정할 경우 강경 대의원들에 의해 판이 깨질 것이라고 말한다. 통합신당파 측의 일부는 “전당대회를 치르더라도 미리 당의 진로에 대한 사전 합의를 이뤄낸 뒤 이를 ‘추인’하는 전당대회가 돼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통합신당 세몰이를 하려던 것도 그런 내심 때문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편지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전당대회가 당장의 현안으로 대두됐지만 이를 거부할 명분이 마땅치 않은 데다 노 대통령의 태도 표명에 즈음해 친노 진영의 일부 의원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것도 지도부에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정청래 의원은 이날 당 홈페이지에 ‘당의 진로는 당원에게 먼저 물어봐’라는 글을 올렸다.
권태홍 참정연 사무처장 등 ‘당원대표’들과 친노계 당원협의회장, 상무위원, 중앙위원, 당원들은 5일 서울 영등포 중앙당사에서 기자회견 열어 전당대회 준비위원회 구성과 비상대책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할 예정인 등 실력행사를 벼르고 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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