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찬 前서울대 총장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정 전 총장에게 정치 참여 의사를 타진하는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 의원 외에도 많다. 정 전 총장이 지난달 서울 여의도에서 우연히 여당 의원들과 만나 폭탄주를 마신 사실이 입소문으로 퍼져 여당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 전 총장은 여권의 ‘외부선장’ 영입 대상 0순위다. 서울대 총장 출신이라는 점, 개혁 성향의 학자이면서 동시에 입시 등 교육정책을 놓고 현 정부와 맞서는 등 강단을 보여 준 점, 영호남이 아닌 충청(충남 공주) 출신으로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스승인 조순 씨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참모로 활동했고 직선 서울대 총장에 당선되는 등 나름대로 선거를 치러 본 경험도 있다.
물론 정 전 총장은 대선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친다. 이 의원에게도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9월 28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동문회가 주최한 조찬 모임에서는 “저는 대통령감이 못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감이 못 된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화제가 됐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모두들 자기가 잘났다며 지지해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진솔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심어 줬다”고 분석했다.
최근 그를 대학 연구실에서, 그리고 한 사석에서 만나 이에 대해 물어본 일이 있다. “대통령감이 못 된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대선후보 여론조사 때 내 이름을 빼 달라’고도 했는데….”
정 전 총장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는 “서울대 조찬 모임 발언은 ‘사고’였다”고 말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석자가 ‘총장님은 인지도가 떨어지고 친밀도도 없고, (대선에 나갔다가) 서울대 망신만 시키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군요. 서울대 망신이라니,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나요.” 모욕감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다고 정치에 뜻이 있다는 건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감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전후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지 속으로 나 자신을 스스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거나 대권에 관심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는 다만 “서울대 총장을 그만둔 뒤 무엇으로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를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거기 간 사람들 다 망해서 오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끔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말을 한다. 대전일보 인터뷰에선 “국격(國格)을 조금이라도 높일 사람, 혹은 국격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고, 서울신문 인터뷰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인기가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항공모함을 좌우로 흔들어 국민을 뱃멀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 망해서 오더라’는 그의 말이 정말 정치를 할 뜻이 없는 것인지,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고백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어쩌면 마음의 결정을 아직 못했을 수도 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한명숙 국무총리
한명숙 국무총리는 지난달 27일 서강대 초청 특강에서 ‘같은 여성으로서 박 전 대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박 전 대표가 이미 유력한 대선 후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은 다분히 상대를 의식하고 나온 말이라는 것이 한 총리 주변의 분석이다.
한 총리는 4월 취임 직후부터 공석 및 사석에서 대선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매번 “국정에 전념하겠다. 지금은 대선에 전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총리 주변 인사들의 기류는 총리 취임 초기와 상당히 달라졌다. 두세 달 전 한 총리의 측근은 한 총리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을 전혀 모르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며 일축했다.
지역 구도가 강한 한국의 현실상 평양이 고향인 한 총리를 누가 지지하겠느냐는 것. 또 그는 “북한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북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대가 박 전 대표라면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한나라당에서 박 전 대표가 후보가 될 경우 자연스럽게 여성 후보를 찾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고, 이럴 경우 현재 여권과 진보 진영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여성 후보가 한 총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민주화 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이미지, 정신여고 이화여대 여성민우회 출신으로 생긴 여성계 기반, 재선 의원이자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지낸 경력 등으로 볼 때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계산이 포함돼 있다.
최근 한 총리가 군을 비롯해 보수 성향 단체의 행사를 자주 찾는 것도 보기에 따라선 대선 행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수층 끌어안기’에 나선 것 같다는 얘기다.
한 총리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북한 미사일 및 핵실험 등 최근 일련의 안보 위기 상황에서 재향군인회 및 이북 5도지사와의 만남, 순직 장병 유가족 간담회, 육군사관학교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버웰 벨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을 비공개로 만나기도 했다.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사퇴 문제로 당과 청와대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자 직접 ‘총대’를 메고 “해임 건의도 할 수 있다”고 강한 자세를 보여 김 전 부총리의 자진 사퇴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이 한 총리를 ‘민주화운동 출신이지만 보수층과도 대화가 통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했다는 게 참모들의 주장이다.
과연 한 총리는 여권의 대선 후보군에 이름을 올릴 생각이 있을까. 한 측근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인 한 총리가 전혀 생각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은 대선과 관련된 어떤 생각이나 행동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 측근은 “한 총리는 스스로 나서서 어떤 자리를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며 “자연스럽게 (대선 후보로) 한 총리가 필요해지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까지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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