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커튼 뒤의 대선주자’들

  • 입력 2006년 12월 9일 03시 02분


《여권에서는 ‘커튼 뒤의 대선주자’를 거론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17대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두고 한나라당의 유력 대선주자는 사실상 대선 레이스에 돌입했지만 열린우리당 후보군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2∼3% 수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여권에서는 정치권은 물론 비(非)정치권 인사들의 이름까지 잠재적 대선주자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다. 열린우리당에서 영입 대상 인물로 거론되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등은 한결같이 “관심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여권의 구애는 계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여권 내 몇몇 인사는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다윗’(노무현 후보)이 ‘골리앗’(이인제 후보)을 꺾었던 드라마의 재연을 기대하며 대권을 향한 행보를 하고 있다.》

정운찬 前서울대 총장

“한번 깊이 생각해 보세요.”

열린우리당 이강래 의원은 얼마 전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과 오찬을 하며 이런 인사를 건넸다. 열린우리당이 민주당 및 기타 세력과의 통합을 통해 전열을 정비한 뒤 대선후보 오픈프라이머리(국민경선제)를 도입하면 경선 출마를 고려해 달라는 얘기다.

정 전 총장에게 정치 참여 의사를 타진하는 열린우리당 의원은 이 의원 외에도 많다. 정 전 총장이 지난달 서울 여의도에서 우연히 여당 의원들과 만나 폭탄주를 마신 사실이 입소문으로 퍼져 여당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정 전 총장은 여권의 ‘외부선장’ 영입 대상 0순위다. 서울대 총장 출신이라는 점, 개혁 성향의 학자이면서 동시에 입시 등 교육정책을 놓고 현 정부와 맞서는 등 강단을 보여 준 점, 영호남이 아닌 충청(충남 공주) 출신으로 지역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스승인 조순 씨가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 참모로 활동했고 직선 서울대 총장에 당선되는 등 나름대로 선거를 치러 본 경험도 있다.

물론 정 전 총장은 대선 얘기만 나오면 손사래를 친다. 이 의원에게도 출마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다. 9월 28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동문회가 주최한 조찬 모임에서는 “저는 대통령감이 못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감이 못 된다’는 말이 역설적으로 화제가 됐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모두들 자기가 잘났다며 지지해 달라고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진솔하고 겸손한 이미지를 심어 줬다”고 분석했다.

최근 그를 대학 연구실에서, 그리고 한 사석에서 만나 이에 대해 물어본 일이 있다. “대통령감이 못 된다고 하셨죠. 그러면서 ‘대선후보 여론조사 때 내 이름을 빼 달라’고도 했는데….”

정 전 총장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는 “서울대 조찬 모임 발언은 ‘사고’였다”고 말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에 한 참석자가 ‘총장님은 인지도가 떨어지고 친밀도도 없고, (대선에 나갔다가) 서울대 망신만 시키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군요. 서울대 망신이라니,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나요.” 모욕감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다고 정치에 뜻이 있다는 건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감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전후 사정을 얘기하는 것이지 속으로 나 자신을 스스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거나 대권에 관심이 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는 다만 “서울대 총장을 그만둔 뒤 무엇으로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정치를 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거기 간 사람들 다 망해서 오더라”고 말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가끔 정치적으로 해석될 만한 말을 한다. 대전일보 인터뷰에선 “국격(國格)을 조금이라도 높일 사람, 혹은 국격을 상당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고, 서울신문 인터뷰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인기가 없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항공모함을 좌우로 흔들어 국민을 뱃멀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 망해서 오더라’는 그의 말이 정말 정치를 할 뜻이 없는 것인지, 전혀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을 고백한 것인지 분명치 않다. 어쩌면 마음의 결정을 아직 못했을 수도 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한명숙 국무총리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굉장히 정치 훈련이 잘돼 있고 내공이 깊은 분이다. 여러 면에서 좋은 지도력을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정책 방향이나 정치 지향점은 다르다.”

한명숙 국무총리는 지난달 27일 서강대 초청 특강에서 ‘같은 여성으로서 박 전 대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박 전 대표가 이미 유력한 대선 후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말은 다분히 상대를 의식하고 나온 말이라는 것이 한 총리 주변의 분석이다.

한 총리는 4월 취임 직후부터 공석 및 사석에서 대선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매번 “국정에 전념하겠다. 지금은 대선에 전혀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 총리 주변 인사들의 기류는 총리 취임 초기와 상당히 달라졌다. 두세 달 전 한 총리의 측근은 한 총리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현실을 전혀 모르는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며 일축했다.

지역 구도가 강한 한국의 현실상 평양이 고향인 한 총리를 누가 지지하겠느냐는 것. 또 그는 “북한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북 출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대가 박 전 대표라면 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한나라당에서 박 전 대표가 후보가 될 경우 자연스럽게 여성 후보를 찾는 분위기가 형성될 것이고, 이럴 경우 현재 여권과 진보 진영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여성 후보가 한 총리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민주화 투쟁 경력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이지 않은 이미지, 정신여고 이화여대 여성민우회 출신으로 생긴 여성계 기반, 재선 의원이자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지낸 경력 등으로 볼 때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계산이 포함돼 있다.

최근 한 총리가 군을 비롯해 보수 성향 단체의 행사를 자주 찾는 것도 보기에 따라선 대선 행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보수층 끌어안기’에 나선 것 같다는 얘기다.

한 총리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란, 북한 미사일 및 핵실험 등 최근 일련의 안보 위기 상황에서 재향군인회 및 이북 5도지사와의 만남, 순직 장병 유가족 간담회, 육군사관학교 방문 일정을 소화했다.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버웰 벨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을 비공개로 만나기도 했다.

김병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의 사퇴 문제로 당과 청와대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자 직접 ‘총대’를 메고 “해임 건의도 할 수 있다”고 강한 자세를 보여 김 전 부총리의 자진 사퇴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 같은 모습이 한 총리를 ‘민주화운동 출신이지만 보수층과도 대화가 통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했다는 게 참모들의 주장이다.

과연 한 총리는 여권의 대선 후보군에 이름을 올릴 생각이 있을까. 한 측근은 “기본적으로 정치인인 한 총리가 전혀 생각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라며 “그러나 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은 대선과 관련된 어떤 생각이나 행동도 보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이 측근은 “한 총리는 스스로 나서서 어떤 자리를 차지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런 모습을 싫어한다”며 “자연스럽게 (대선 후보로) 한 총리가 필요해지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까지는 자중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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