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철(45) 씨의 큰형 세년(납북 당시 23세) 씨는 1975년 2월 비무장지대에 있는 대성동 ‘자유의 마을’로 일하러 갔다가 그해 8월 이곳에서 북한군에 의해 강제로 납북된 후 소식이 끊겼다.
주한 유엔군사령부는 “26일 오후 4시 15분경 북한 무장군인 2명이 대성동 근처에 침입해 한국 민간인 1명을 강제로 납치했다”고 발표했다. 김 씨의 납북은 본보 1975년 8월 27일자 1면에 보도됐다.
이원경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이 27일 “북괴 측의 비인도적인 폭력행위를 민족의 이름으로 규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9일에는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서 대규모 납북규탄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김 씨의 납북은 세상에서 잊혔다. 오히려 군사정부 시절 김 씨 가족은 공안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숨죽이고 살아 왔다. 생사 확인 요구는커녕 세년 씨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정권이 바뀐 뒤 세철 씨는 북한의 눈치를 보며 납북자 문제의 언급조차 꺼리는 정부를 보며 형의 생사 확인을 포기하려고도 했다. 그사이 부모님과 작은형이 세상을 떴다.
○ 죄인으로 지낸 30년
날벼락 같은 소식에 “우리 아들 좀 찾아 달라”며 실성한 듯 돌아다니던 아버지는 얼마 후 누군가를 만난 뒤 가족에게 “어디 가서 이 사실을 떠들고 다니지 마라. 우리까지 위험해진다”고 조용히 말한 뒤 고개를 떨어뜨렸다.
“공안당국은 납북자가 세뇌당해 간첩으로 내려올 것인지에만 관심을 갖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납북자 가족들도 똑같은 고통을 당했더군요.”
장남을 잃고도 납북 사실조차 꺼낼 수 없었던 아버지는 매일 술을 찾으며 한탄하다 건강이 악화돼 7년 만에 눈을 감았다. 어머니는 사망 직전까지 큰형을 찾았다.
세철 씨 역시 감시 대상이었다. 누군가 세철 씨를 미행하는 것은 예사였다.
○ 납북 사실조차 모르는 정부
6월 말 고교 1학년 때 선유도에서 납북된 김영남 씨 모자의 상봉 소식이 전해지고 정부가 ‘납북자 가족 지원을 위한 특별법’을 입법예고했다는 얘기를 들은 세철 씨는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용기를 냈다.
그러나 통일부는 “납북자 명단에 없는 데다 우리는 명단 이외의 납북자 실태에 대한 조사권한이 없다”며 “60여 년 되는 역사를 다 뒤져 납북자 자료를 찾을 여력도 안 된다”고 말했다. 통일부는 “납북자 조사는 국가정보원 업무”라며 책임을 넘겼다.
국정원은 “납북자 현황 공식 집계는 통일부 소관”이라고만 밝혔다.
통일부는 전후 납북자특별법이 통과돼야 납북자 실태 조사가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정부가 입법예고까지 한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채 올해를 넘길 분위기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반공 캠페인에 잠깐 이용하다가 간첩으로 내려올 가능성이 있다고 박해하고 민주화 이후에는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 아는 체도 안 하고…. 도대체 납북자와 그 가족에게 국가는 무엇입니까.”
세철 씨의 절규다.
파주=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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