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작전통제권 환수와 관련해 역대 군 수뇌부를 비하하고, 군 복무를 ‘썩는 것’으로 표현한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고건 전 국무총리가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자가당착’이라고 반박한 것을 물고 늘어지며 ‘감히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연일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 때문에 청와대가 수세적 상황을 탈피하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정치게임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가 해명해야 할 문제들=야당과 전문가들은 대통령의 21일 발언으로 촉발된 사회적 정치적 논란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태세다.
한나라당은 24일 논평에서 “대통령의 군 복무 단축 발언은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부모들의 표를 겨냥한 대선용”이라며 군 복무 단축 문제는 △국방력 강화 △대선용 포퓰리즘 배제 △밀실 논의 중단 △국민적 공감대와 여야 합의 원칙 아래 논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는 “군대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라는 노 대통령의 언급에 대해 “군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 국방력이 북한보다 강하다는 등 대북(對北) 관련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 유기준 대변인은 “안보는 1%라도 오차가 있으면 안 된다”며 “북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 그 자체가 안보 불안을 부추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전시작전권 환수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전직 군 수뇌를 비하한 데 대한 군 원로들의 반발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역대 국방부 장관 등은 26일 노 대통령의 해명 요구와 함께 규탄성명을 발표할 예정이다.
노 대통령이 한미 관계를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등으로 표현한 것을 두고 한나라당 유 대변인은 “외교는 실리를 고려해 신중하게 발언해야 하는데 너무 감정에 치우친 것 같다”고 꼬집었다.
한 정치학 교수는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사람이 대한민국 군대를 ‘인생을 썩히는 곳’ 정도로 비하하고, 수십 년 군문에 봉직한 사람들을 ‘별이나 달고 거들먹거린 사람’이라고 매도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딴청을 피우고 있다”고 탄식했다.
한 원로 교수는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으로 온통 난리가 났는데 겨우 한다는 게 고작 특정 정치인의 발언을 꼬투리 잡는 것이요, 비서들은 통합신당 견제 등 정치적 효과나 계산하고 있으니 나라가 제대로 가겠느냐”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최근의 집값 폭등과 경제 불황 등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과 관련해 경제 전문가들은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인 경제를 빠뜨린 것은 국정의 우선순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비판했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고 前총리 통합신당 구심점 제동걸어▼
▽“정치적 효과는 충분히 거뒀다”=노 대통령은 자신의 21일 발언 파문과 관련해 23일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후속 언급’을 했다. “나는 고 전 총리를 나쁘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가 왜 나를 공개 비난하는지 유감이다”는 내용이다. 청와대 측은 이날 참모회의 대통령 발언 중 이 부분만 공개했다.
청와대는 24일에도 청와대브리핑에 글을 올려 고 전 총리를 재차 공격했다. 다른 비판에는 대응하지 않고 유독 고 전 총리가 대통령을 비판한 것만 문제 삼고 있는 것.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도 정치적 의도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노 대통령의 민주평통 발언이 외교안보를 비롯한 국정에 어떤 파장을 초래했는지의 문제와 별개로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고 전 총리를 아우르려는 ‘통합신당’ 추진 움직임에 제동을 거는 상당한 ‘정치적 효과’를 거뒀다는 것이 청와대의 자평이기도 하다.
고 전 총리에 대한 공격을 통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통합’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그를 축으로 한 통합신당 논의의 김을 빼는 효과를 거뒀다는 계산이다. 청와대는 ‘고건은 안 된다’는 대통령의 의지가 분명하게 부각되면서 노 대통령이 정계개편 논의에 개입할 발판을 확보했다는 평가도 하고 있다.
여권에서는 고 전 총리에 이은 ‘각개격파’ 대상은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김근태-정동영 비판…새판짜기 노려▼
▽김근태, 정동영 “대통령 페이스에 말릴라”=김 의장과 정 전 의장 측도 청와대의 정치적 의도를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노 대통령의 21일 발언 후속조치로 청와대가 군 복무기간 단축 검토를 발표한 데 대해 열린우리당이 공식으로 환영 논평을 냈지만 김 의장과 정 전 의장이 24일 현재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은 것도 대통령에 대한 경계심과 무관치 않다.
두 사람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남북간 긴장완화를 주장하는, 이른바 평화론자들이다. 군복무 단축이 필요하다는 게 이들의 기본 태도다. 그런데도 김 의장의 한 측근은 “당의 공식 의견이 나갔다. 따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말을 아꼈다. 정 전 의장과 가까운 한 의원은 “대통령의 정치적 목적을 모르니 민감히 반응하지 말자고 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21일 발언에는 김 의장과 정 전 의장을 겨냥한 것도 있다. ‘정적을 기용했는데,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있다’는 대목이 그것. 두 사람에 대해 ‘은혜를 저버렸다’고 비난하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지만 두 사람은 이에 대해서도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이미 대통령 페이스에 말려들어 입지를 잃고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정치권에선 나온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청와대 참모들이 보기에도 민망했나▼
“미국한테 매달려 가지고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가지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백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냐?”(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발언)
“미국한테 매달려서, 미국 뒤에 숨어서 형님만 믿겠다, 이게 자주 국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22일 청와대 사이트 전문)
청와대가 인터넷 홈페이지에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평통 발언 전문을 올리면서 실제 강연 때 말했던 거친 단어나 표현을 상당 부분 삭제하거나 순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와대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며 언론 보도를 비판했지만 참모들이 보기에도 노 대통령이 말한 ‘나무’가 지나쳤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전직 국방부 장관과 장성들을 비난하며 “심심하면 사람한테 세금 내라 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부분은 “세금도 냈는데…”로 대폭 삭제해 올렸다.
미국 국무부가 9·19 공동성명에 합의하고 재무부가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을 제재한 것을 언급하며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냐”고 말했지만 사이트에는 “나쁘게 보면 일부러 그런 것 아니냐”로 고쳤다.
“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 들어온 놈” 부분에서 ‘놈’을 ‘사람’으로, “저도 욕만 바가지로 얻어먹고 사니까”라는 표현에서 ‘바가지로’는 삭제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돌았다’는 표현을 썼던 두 부분도 삭제하거나 ‘정신 이상’으로 순화했다.
불필요한 추임새와 반복했던 부분도 생략했다. 노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기 전 “시간이 좀 괜찮냐? 좀 더 말씀을 드릴까요?”라고 추임새를 넣었지만 생략한 채 올렸다. 고건 전 국무총리의 인사 기용 실패를 언급하면서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결과적으로 실패해 버린 인사지요”라고 한 부분에서도 ‘하여튼 실패한 인사다’ 부분을 뺐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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