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데다가 26일 국무회의에서 “앞으로는 할 말을 다 하겠다”고 공언한 직후 참석한 첫 외부 행사인 만큼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 내용에 관심이 쏠렸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정계개편 등 정치 현안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게 없다”고 밝혔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거꾸로 경제 분야에서 부동산을 뺀 다른 부분은 잘했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어 ‘작심한 듯’ 언론에 직격탄을 날렸다.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막말 파문을 의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보여 준 현실 인식이 부정확할 뿐 아니라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 “한국경제 6∼7% 성장 더는 기대해선 안돼”
노 대통령은 현재 우리 경제 상황과 관련해 “결코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고 젊은이들의 취업난도 심각하다. 기업들의 투자 마인드가 위축되면서 성장잠재력도 크게 낮아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7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한국 경제의 실상을 ‘외화내빈(外華內貧)’과 ‘불안’이라는 두 단어로 압축했다. 경제성장률 5%, 수출 3000억 달러, 주가지수 1,400선을 돌파하는 등 겉으로 보기에 나빠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속빈 강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노 대통령은 이 같은 문제에 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아주대 현진권(경제학) 교수는 “(노 대통령이) 한마디로 경제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다”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이념적 잣대로 지금의 경제 상황을 바라보니 잘못한 것이 없어 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정부 바깥에서는 아무래도 제일 센 것이 재계”라고 말했다. 기업을 경제를 이끌어 가는 주체가 아니라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다음 달 초에 열리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신년교례회에 불참키로 한 것을 두고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 “세금 얘기 나오면 ‘월급쟁이가 봉인가’ 깃발 들고 나서”
노 대통령은 이날 ‘비전 2030’에 대한 재원 마련 방안을 언급하면서 “세금 95%를 상위 20%에서 낸다”며 “세금이 올라도 상위 20%가 감당하기 때문에, 내가 층을 가르는 건 아니지만,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나 세금 못 내겠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거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세금을 늘려도 중간층은 내는 것보다 받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다.
경희대 안재욱(경제학) 교수는 “세금이라는 것은 많이 걷으려 할수록 회피하려고 하는 의욕이 강해지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납세자 자극 발언은 오히려 근로의욕 등의 상실로 조세 수입 감소를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 “3·30 대책 내놓고 한숨 돌리니 사고 터져”
노 대통령은 부동산 정책에 시행착오가 있었고 올해 3·30대책 이후 사고가 터졌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큰 사고는 아니고 타이트하게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부동산 전문가들은 대통령이 처음으로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인정했지만 현실 인식이 여전히 안이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냈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현 정권 출범 이후 지난달 말까지 전국 아파트 값은 28.6%, 서울은 44.6%,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은 39.7% 급등했다.
건국대 조주현(부동산학) 교수는 “현 정부는 강남 집값 잡는 것을 목표로 부동산 정책 규제를 남발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실패를 겪었다”며 “지금이라도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과도한 세금 때리기와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 “신문 보면 ‘내가 이런 소릴 했나’ 깜짝 놀라”
노 대통령은 재계와 언론을 특권, 유착구조로 규정한 뒤 “(언론과) 결탁을 거부하고 부당한 공격에 항거하며 ‘틀렸다, 틀렸다’ 그러니까 지금 싸움이 붙어 있다”고 했다. 이어 “(언론과) 손잡으라면 내일부터 손잡겠다. 그러나 (언론과 손잡으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개혁 과제는 포기해야 한다. 이것을 좀 이해해 달라. (그래서)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민주평통 당시 막말 파문과 관련해 “내가 막말을 잘하지만 한쪽으로 보면 막말만 하는 건 아니다. 오늘도 (좋은 말) 많이 했다”며 “(그러나) 내일 신문 보면 ‘이 사람 이런 소릴 했나’라고 나도 깜짝 깜짝 놀란다”고 언론 보도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정작 민주평통에서 “군대 가서 몇 년씩 썩지 말고…” 등의 군 비하 발언을 한 당사자는 노 대통령이었다.
○ “내게 주어진 수단은 언론과 결탁하지 않는 것”
노 대통령은 이날 “나에게 주어져 있는 수단은 폭력도 없고, 국회에서 법을 내 맘대로 만들 수도 없다. 결국 (언론과) 결탁하지 않는 것이다”고 말했다. 자신이 언론으로부터 핍박받는 ‘약자’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편 가르기’ 전술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각종 인사권과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 등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정권과 언론의 긴장은 본질적 문제이지만 언론을 특권집단으로 규정한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라며 “대통령 발언엔 언론에 대한 피해의식이 깔려 있으며 임기 말이 될수록 언론 환경이 어려워지고 있는 위기의식을 토로한 것”이라고 말했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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