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최규하 전 대통령의 서교동 사저도 지하실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보았고, 다른 수재민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8년 5월 당시 관선 마포구청장으로 부임한 조남호 전 서초구청장이 최 전 대통령을 인사차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망원동 수재가 화제에 올랐고 최 전 대통령은 “그때 돈으로 보상받을 수 없는 귀한 자료를 많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외교관 시절부터 30여 년 동안 꼼꼼하게 기록해 둔 메모, 업무일지 등을 지하실 창고에 보관해 두었는데 대부분 수성 사인펜으로 써 놓은 것이라 잉크가 번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올해 10월 최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직후 1979∼80년 격동기의 비사가 담겨 있을 비망록의 존재 여부가 화제에 올랐을 때 조 전 구청장은 사석에서 이 얘기를 털어놨다. 이런 사연을 처음 접한 최 전 대통령의 몇몇 측근은 “비망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냐”며 안타까워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재임 중에 많은 육필 메모를 남겼다. 새마을운동처럼 자신이 역점을 둔 사업과 관련한 행사에서 치사를 할 때에는 참모들이 써 준 글을 읽지 않고 반드시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어 직접 연설 메모를 준비했다.
1972년 새마을운동 경진대회에서 연설하기 전에 파란색 사인펜으로 휘갈겨 쓴 17장짜리 장문의 메모가 대표적이다. 군 교육기관에 금일봉을 보내면서 동봉한 “직원들에게 위로금 조로 사용하시오”라고 적은 짤막한 편지 메모는 얼마 전 경매에서 500만 원에 낙찰됐다. 그 내용이 어떠하든 대통령의 메모는 작은 쪼가리 하나라도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점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최근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할 말을 다 하겠다”며 양복 윗옷 주머니에서 꺼낸 한 장의 봉황 문양 메모지가 카메라 앵글에 선명하게 잡혀 공개되자 일반인은 묘한 감상을 느꼈던 것 같다. 그날의 발언 내용을 떠나 육성으로 더 익숙해 있던 노 대통령을 몇 줄의 글로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필체를 처음 봤다”며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글씨가 달필이네”라는 반응도 있었다.
노 대통령은 틈나는 대로 적어 놓은 어떤 구상이든, 참모들에게 지시할 사항을 적어 놓은 것이든 수시로 자신의 메모를 국정기록비서관에게 넘겨 보존하도록 할 만큼 기록 관리에 철두철미한 편이다. 청와대 관저에서 이뤄진 비공식 회동도 모두 기록으로 남겨 보존하는 대상에 올라 있다.
필생의 기록을 담은 비망록 내용을 타계하는 그날까지 1만분의 1도 입에 올리지 않으려 한 최 전 대통령에게선 ‘역사로부터의 도피’가 느껴진다. 반면 노 대통령은 막말 시비를 피하기 위해 메모까지 준비했건만 의도와 달리 또다시 끓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새해에는 국민에게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주는 ‘준비된’ 메모가 카메라 앵글에 잡히기를 기대해 본다.
김정훈 사회부 차장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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