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환담에서 재계 총수들은 모두 환율 불안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으며 노 대통령도 이에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기업인 특별사면 건의나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규제 완화 등 재계의 ‘민원’ 사항에 대한 논의는 없었다.
한편 행사 전 이건희 회장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사면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내년 2, 3월경 (사면) 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될 것 아니겠나. 좋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차기 전경련 회장 취임 가능성에 대해선 “나는 아니다. 아직 논의되는 것 없다”고 부인했다.
○노 대통령 발언 내용
노 대통령은 4대그룹 회장과의 면담에서 “수출 3000억 달러 달성, 경제 5% 성장 등 금년 경제를 이끌어 준 기업들의 노고를 격려한다”며 기업의 적극 투자를 주문했다고 윤대희 대통령경제정책수석비서관이 전했다.
노 대통령은 또 “경제 전망이 불투명할 때일수록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 미래성장 동력을 위한 기술개발 투자 확대를 위해 노력해 달라”며 “에너지 확보를 위한 재원 마련과 자원 개발 전문 인력 양성 등 에너지 문제를 장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부품 산업의 기술은 대기업 지원으로 선진 수준을 많이 따라가고 있는데 소재 산업은 중소기업이 감당하기 어렵고 기술 격차도 크기 때문에 대기업이 특히 관심을 기울여 줘야 한다”고 했다. 4대 그룹 회장들이 환율에 대해 우려를 표시한 데 대해서는 “전체 경제 운영의 틀에서 노력을 하겠으며 국내유동성을 해외로 돌리는 자본거래를 통해 환율절상 압력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외투자 및 진출 확대 방안을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또 “내년 7월 결정되는 평창 동계올림픽과 내년 12월 결정되는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가진 대기업들이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이어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성과보고회에서 “시장경제원리에 어긋난 정책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비정규직은 연수, 훈련의 대상에서 제외돼 자기발전의 기회가 없어 국가 전체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국가경쟁력의 핵심은 기술혁신과 인적자원인데, 인적자원 개발을 위해 대기업 등이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4대그룹 회장 면담 분위기
이날 환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고 윤 수석은 전했다. 정몽구 회장만 미리 써 온 메모를 보고 답했으며 다른 회장들은 원고 준비 없이 즉석에서 말하는 형식으로 대화가 진행됐다.
이건희 회장은 “(올해는) 환율, 고유가, 불경기 등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며 “현재보다도 앞으로 5년, 10년 후 무엇을 먹고 사느냐는 문제를 고심하고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서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부족한 중소기업 인프라를 정부와 기업이 합심하여 확충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구본무 회장은 “금년 준공된 LG 필립스LCD 공장이 디스플레이 클러스터로 일관 생산체제를 갖추게 되면 관련 회사들이 더 많은 투자를 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정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는 75%가 수출인데 환율이 급락하면서 손익 면에서 여러 가지로 좋지 않다”며 “지난번 여수 박람회 유치 노력은 좌절됐으나 2012년 박람회 유치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은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은 물론 중국, 일본과의 협상도 추진해야 한다. 글로벌 경영을 위한 기업의 해외 진출 노력을 적극 지원해 달라”고 말했다.
○4대그룹 회장과 대통령의 면담 의미
노 대통령은 2003년 6월 청와대 인근 삼계탕 집으로 미국 방문 때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했던 이건희, 정몽구, 구본무 회장 등을 초청해 오찬을 한 바 있다.
지난해 3월엔 구본무 회장 부부를 청와대 관저로 초청해 배석자 없이 만찬을 했고, 같은 해 4월 17일 터키 방문 때는 이스탄불 인근 이즈미트 현대자동차 현지공장을 방문해 정몽구 회장과 단독 오찬을 했었다.
이처럼 재벌 회장과의 만남이 전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임기 1년을 남겨둔 상태에서 노 대통령이 굳이 4대그룹 회장을 별도로 만난 것은 그동안 추진해온 각종 재벌 개혁 조치가 실효 없이 끝나고 있는 상황에서 임기 말 경제지표 관리를 위해서는 역시 대기업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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