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면 사람들한테 세금 내라 하고,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고 훈련시키고 했는데…. 그 위의 사람들은 뭐 했나. 자기 나라, 자기 군대의 작전통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나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그런 것이냐.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제50차 상임위원회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을 동네북처럼 이렇게 두드리면 저도 매우 섭섭하고 때로는 분하다.
그동안 여러 차례 제가 공격을 받았다. 참아 왔는데, 앞으로는 하나하나 해명하고 대응할 생각이다. 할 일도 열심히 하고 할 말도 다 할 생각이다. (26일 국무회의에서)
저희 정부가 정책에 시행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제일 큰 게 부동산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부동산 말고 꿀릴 것 없다.
오늘은 타고 간다고 긁고, 내려서 걸어서 간다고 긁고, 아침저녁으로 관점 바뀌면서 (나를) 두드린다. 아직도 기업에 와서 손 벌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협찬해라, 협찬하시죠? 재벌의 회장 구속되면, 언론사가 재미 보는 구조 위에 있지 않느냐. 이것 제가 어찌할 방법도 없다. (27일 부산북항 재개발 종합계획 보고회 간담회에서)》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말았다는 것이냐.”(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요즘 대통령이 동네북이 되어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아 참아 왔는데 앞으로는 하나하나 해명하고 대응하겠다.”(26일 국무회의에서)
“부동산 말고 꿀릴 것 없다.”(27일 부산 북항 재개발보고회 오찬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격정적인 민주평통 발언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민주평통 발언 이후에도 계속해서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쏟아 내자 조용히 한 해를 마감하던 많은 국민은 대통령의 입을 걱정하고 있다. 그만큼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치 사회적 파장이 크다.
○ 정치 사회적 상흔
21일 민주평통 발언 이후 열흘 동안 노 대통령이 쏟아 낸 격정 발언은 정치 사회적인 파장과 함께 많은 상흔을 남겼다.
전직 국방장관 참모총장 등 군 원로들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군 원로들의 반발이 거세자 발언 닷새 후인 26일 국무회의에서 “표현 과정에서 좀 절제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이리저리 시비에 휘말린다”며 우회적으로 유감을 표명했으나 군 원로들의 노기(怒氣)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군 원로들은 새해 초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한 뒤 후속 대책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은 군통수권자와 군 원로들의 불편한 관계를 불안한 심경으로 바라보고 있다.
노 대통령의 “군대 가서 몇 년씩 썩지 말고…” 발언도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소개한 여러 인터넷에는 “군대 가지 말자. 뭐 하러 군대에서 썩고 있느냐”는 누리꾼(네티즌)들의 댓글이 쇄도했다. 노 대통령의 군 비하 발언에 이어 청와대가 군 복무기간 단축을 검토하겠다고 밝히자 입대를 준비하던 젊은 층은 “군대를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며 당황하고 있다. 군 장병들 사이에선 “우린 뭐냐”는 불만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변양균 대통령정책실장이 29일 “군 복무기간 단축이 결정될 경우 입대 시기와 관련하여 그 시기 여하에 따라 개인에게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도록 세세한 제도적 보완책도 함께 검토되고 있다”고 말해 형평성 차원에서 기존 입대자의 복무기간 단축도 검토 중임을 시사하며 진화에 나섰다.
○ 잦은 ‘격정 발언’… 이젠 지겹다
노 대통령의 직설적 화법과 태도는 본질적으로 2002년 대선후보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편을 가르고 표적을 정해 직설적이고 거친 표현으로 공격하는 노 대통령의 스타일은 사실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직설적 표현에 대한 평가는 4년 전인 2002년 12월과 너무 다르다.
대선후보 시절만 해도 기존 정치인에게선 볼 수 없는 노무현식 거친 표현에 사람들이 흥미를 보인 게 사실이다. “남북대화 하나만 잘하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는 발언에 보수층은 혀를 찼지만, 일부 젊은 사람은 “통쾌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오늘 노 대통령의 격정 발언에 대해 많은 국민은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격정 발언과 ‘역발상’도 한두 번 접할 때는 신선했지만 빈도가 잦아지면 식상해지는 법이다. 더구나 부동산 정책 실패 등으로 인해 국정운영 지지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쏟아내는 ‘한풀이’ 같은 격정 발언에 적지 않은 국민이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분석한다.
건국대 의대 하지현(정신과) 교수는 “노 대통령의 거친 말은 사람들의 심리를 불안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가 나른하고 재미없고 안정적인 사회라면 그런 지도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사회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안정적인 리더가 필요하다”며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으로 봐 달라고 하는데 국민이 원하는 것은 대통령 노무현이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거친 표현은 문화 사회적으로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서울대 김종철(국어교육학) 교수는 “말에는 허용 범위가 있는데 허용 범위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생각하면 노 대통령의 발언은 범위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다”며 “사회는 여러 층위의 집단이 얽혀 있고 그 층위마다 요구되는 적절한 문법이 있는 셈이다. 노 대통령의 거친 표현들로 문법이 다 무너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지적도 많다.
○ 입에 밴 것인가, 의도된 것인가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과 취임 이후 쏟아 낸 비속어는 우선 양으로 엄청나다. 그는 자신이 거친 말을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언론이 이를 지적하면 오히려 더 거친 표현을 사용하는 경향도 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시절 “남북대화 하나만 잘하면 다 깽판 쳐도 좋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당시 언론이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비판하자 노 대통령은 ‘깽판’이란 말을 가는 곳마다 사용하고, ‘양아치’라는 비속어를 쓰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거친 말에는 기득권에 대한 적대 의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많다.
“흔들어라 이거지요,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 등의 표현에도 그런 의식이 배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의식이 언어규범을 파괴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윤재(정치학) 교수는 노 대통령의 화법을 정치학적으로 분석한 ‘노무현 대통령과 한국의 정치문화’라는 논문에서 노 대통령이 마음속에 ‘화(火)’를 담고 있는 정치인이라고 진단했다. 정 교수는 “노 대통령이 구사하는 격정의 언어는 한국 정치와 주류 세력에 대한 비판과 울분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이라며 “이는 순치된 언어가 아닌 직설(直說)로 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노 대통령이 선택한 전략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측근들은 이런 직설적 표현 습관이 고교 졸업 후 한때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할 때 몸에 밴 것 같다고 설명한다. 노 대통령 취임 초 잇단 설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한 측근은 “노 대통령이 정치 초년병 시절에 ‘나는 원래 촌놈이어서 누가 뒤통수만 톡 쳐도 입에서 (거친 말이) 막 튀어나온다. 그러니 어떡하겠느냐’고 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의 거친 표현이 임기를 1년여 남겨 놓은 시점에 집중되고 있는 배경은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우선 노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말 국정 장악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띄운 것으로 보인다. 거친 표현을 동원한 선제공격을 통해 임기 말에 닥치는 ‘레임덕(권력누수현상)’을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경고 대상은 주로 고건 전 총리나 여권의 대선주자는 물론 현직 국무위원들을 향하고 있다. 범여권 대선주자들이 본격적으로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나서고 현직 국무위원들이 흔들리면 레임덕은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고 전 총리의 반발엔 즉각 반격하면서도 역대 군 수뇌부의 사과 요구에 대해선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도 거친 말이 계산에 의한 것임을 뒷받침한다. 군심(軍心)을 자극할 경우 논란이 증폭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연세대 리더십센터 조진만 선임연구원은 “임기가 1년 남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이니셔티브(주도권)를 빼앗기고 레임덕에 휘말린다. 내년 대선까지 겨냥해 거친 표현으로 피아를 구분하며 판을 흔들어 보기 위한 차원에서 한 것 아닌가 싶다”며 “노 대통령은 더는 잃을 게 없다. 새해에 거친 말을 하면 국민이 더 짜증낼 것 같으니까 연말을 타이밍으로 잡은 것 같다”고 말했다.
○ ‘함께 흙탕물로 들어가자는 의도’
하지만 흩어진 지지 세력을 일부 결집하는 데 효과를 얻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노 대통령의 민주평통 발언 전문과 동영상의 조회는 28일 현재 6500여 건에 이르고 7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댓글은 ‘내 선택이 절대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시 힘이 난다’ ‘5년 전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다시 보는 것 같다’는 등 남은 임기 동안 노 대통령을 도와야 한다는 의지를 다지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내에서 노 대통령에 대한 반응은 점점 싸늘해지고 있다. 당 진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의원 워크숍’ 이후 세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파는 “앞으로 전개될 정계개편에서 주도권을 잡겠다는 노 대통령의 전략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반응이다.
의원들은 사석에서 “노 대통령의 거친 언행은 점점 세를 얻는 통합신당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 함께 흙탕물로 들어가자는 의도”라며 “고춧가루 뿌리는데 우리가 후춧가루 뿌릴 필요 있겠느냐”고 말하곤 한다. 친노 세력 결집에 대해서도 “국민의 아주 극소수”라며 영향력을 부인하고 있다. 민주평통 발언 때 강하게 대응했던 고 전 총리 측도 이제 노 대통령의 거친 언행에 대응하지 않고 “갈 길을 가겠다”는 생각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제2의 탄핵을 유도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발언’이라며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정권 재창출이 힘들다고 판단한 노 대통령이 판을 흔들기 위해 어떤 전략을 들고 나올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 리더의 언어는 품격이 있어야
일반 국민 사이에선 정치적 이해득실은 차치하고,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발언은 삼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다. 내년이 걱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노 대통령이 2004년 탄핵 직전 특별기자회견에서 “대우건설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노 대통령의 형 건평 씨)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뒤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이 자살을 택한 사건을 떠올리는 이가 지금도 적지 않다. 같은 내용도 얼마든지 품격 있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데 굳이 ‘썩는다’ ‘깽판’ ‘양아치’ 등 비속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국민이 말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김창남(정치학) 교수는 “효과적인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보통 사람의 언어를 사용해 나의 뜻을 명확히 알리는 것”이라며 “노 대통령은 자신의 화법이 현장의 언어를 담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화법이 의미조차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