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오공단]준비하는 사람, 준비하는 국가

  • 입력 2007년 1월 15일 03시 00분


미국 친구들이 간혹 내게 유서를 만들어 놓았느냐고 물었다. 9년 전, 40대 때 일이다. 처음엔 “재수 없이 왜 벌써부터 죽을 생각을 해” 하고는 관심을 안 뒀다. 어느 날 친구인 젊은 학자가 죽었다. 사망 소식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그가 죽을 준비를 침착하게 하고 주변과 가족 일을 다 안배한 다음, 휴양지에서 차분히 죽었다는 얘기였다.

암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날부터 그는 생을 잘 마무리 짓는 작업을 시작했다. 유서에는 자신의 추도식을 간단하게 할 것과, 손님은 평소에 존경하고 좋아하던 적은 수의 사람으로 만족하며, 재산은 엄마 없이 자라는 어린 딸과 자선 단체에 반반씩 분배하고, 장서는 사랑하는 전문 연구직 후배들에게 배송하도록 상세히 썼다. 모든 일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마감하고 안개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들꽃처럼 겸손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얼마 뒤 남편과 나도 변호사의 공증을 거쳐 합법적인 유서를 만들었다. 집의 장서와 소장품은 가족과 친구, 제자에게 합당히 분배되도록 준비했다. 없어지는 물건, 새로 생긴 물건 목록을 계속 첨부하고 있다. 이후로 미련 없는 편한 마음이다.

위기상황 준비할 때 피해 최소화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다. 준비가 잘된 국가가 있고 그렇지 않은 국가가 있다. 좋은 국가는 예상치 않은 천재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생긴 인재를 맞아 준비된 계획, 예산, 전문 인력을 총동원해서 비교적 큰 손실과 피해 없이, 위기 가운데서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있고, 절기마다 예행연습을 한다.

한국의 가장 큰 위기는 북한의 갑작스러운 변화와 그에 대한 대비책이다. 김정일이 100년 살리라는 보장이 없다. 바보같이 온순하고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런 독창적 생각도 못한다고 보이던 북한 주민들이 어느 날, 하늘이 노랄 정도로 배고프고 질병이 만연할 때 물밀듯 두만강 도강에 나서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휴전선 고압선을 끊고 지뢰에 터져 죽을지라도 잘산다는 ‘아랫동네’나 한번 보고 죽자고, 막무가내로 휴전선 남쪽으로 밀어 닥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한국의 가장 중대한, 예상치 않은 위기는 북한과 관련된 일이다.

내가 아는 한국의 준비 자세와 계획은 문제가 있다. 우선 한국은 북한의 대변화를 바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현 당국의 정책은 ‘미루기’ 또는 ‘달팽이 속도식 변화 장려 정책’이다. 한마디로 북한을 조금 도와주면서 긍정적 변화를 기대할 뿐이다. 위기나 대변화를 언급하는 일 자체가 금기다.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평상시 같은 대응’만 하고 있다.

북한은 계속해서 핵실험을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미국만을 탓하는 소극적 태도이고, 가까운 일본과 적극적 대화를 할 생각은 전연 없다. 북한보다 일본이 더 싫다는 자세다. 손가락도 까닥하지 않고 실리를 챙기는 중국이 드러내 놓고 한국을 업신여기는 짓을 많이 하는데도 사실상 한국을 더 많이 도와주는 동맹국 미국보다 신뢰가 간다는 태도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인권 문제는 완전한 금기 항목이다. 인권을 자꾸 떠들면, 북한의 유일신이며 절대 통치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위를 거스르기 때문이라는 아연실색할 명분을 내세운다. 범죄소굴 두목을 문책하고 처벌하기는커녕 꽃다발과 현금을 갖다 바치는 경찰서와 다름없다. 국가의 근본 전략이 뭔지 머리가 빙빙 돈다.

北 급변사태 대비책 있나

일본은 미국과 함께 북한 위기 시의 근본 대책을 만드는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도 이미 한반도 장기 전략의 지침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당사자인 한국만 강 건너 불 보듯, 시장 바닥에 죽은 생쥐 보듯, 아무 대책이나 준비 없이 매일 정치 싸움이다. 쓸데없는 권력 경쟁, 시대를 역행하는 전근대적 역사관, 이념 싸움에 귀중한 시간을 허망하게 쓰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한국을 도와줄 이웃이 줄어들고, 한국에 대한 국제적 존경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현실에 가슴이 옥죄며, 고통스럽다.

오공단 미국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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