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철 전 주미대사는 최근 서울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기자와 만나 북한의 HEU 프로그램은 왜곡·조작된 면이 있다며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양 전 대사는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0년 8월부터 2003년 4월까지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북한은 HEU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
양 전 대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2002년 당시 방북 사찰단의 단장이던 제임스 켈리 전 동아태 담당 차관보 및 부시 행정부 인사들의 ‘발언’을 들었다.
그는 “지난 2월 13일 6자회담이 끝난 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미국에서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베이징에서는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가 동시에 기자회견을 했다”며 운을 뗐다.
“기자들이 라이스에게 ‘북한의 HEU 프로그램은 R&D, 즉 연구개발 이상의 수준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다’고 대답했어요. R&D 이상 수준이 아니라는 건 핵개발과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힐에게는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시인했느냐’고 물었는데, 그도 역시 ‘아니다’고 답했습니다.”
양 전 대사는 지난해 켈리 전 차관보와 주고받은 대화 내용도 소개했다.
“제가 주미대사로 있는 동안 거의 매일 켈리와 전화통화를 하고 자주 만나기도 했어요. 그런데 작년 5월 워싱턴에서 켈리를 만났는데, 그가 ‘북한은 고농축이 아닌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농축과 고농축은 천지차이예요. 농축이 선행돼야 고농축도 되고 핵개발로도 이어지니까요.”
그는 “켈리에게 ‘그동안 HEU라고 하더니 지금은 왜 EU라고 말하느냐’고 했더니 그는 ‘난 결코 HEU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HEU는 미국이 왜곡한 것”
2002년 10월 2일 제임스 켈리 전 미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를 단장으로 한 8명의 사찰단이 북한을 방문했다. 켈리 전 차관보는 3일과 4일 김계관 북한 외부성 부상과 강석주 외부성 제1부상을 연이어 만났다. 양 전 대사는 사찰단 일행 중 두 명의 인사에게 들은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켈리가 김 부상을 만나 HEU에 대해 물었지만 김 부상은 부인했대요. 켈리는 이튿날 강 제1부상에겐 좀 더 단도직입적으로 HEU에 대해 물었는데, 강 제1부상은 ‘주권문제다. 왜 관여하느냐’는 식으로 응수했답니다. 그 면담 이후 방북단 8명은 그들끼리 ‘강석주가 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합의를 봤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는 “북한이 HEU를 갖고 있다는 켈리의 발표 때문에 모든 게 뒤집어졌다” 며 안타까워했다.
“켈리의 발표 이후 1994년 제네바합의가 사문화됐어요. 또 한반도개발기구가 출범해 우리는 경수로 2기를 짓는데 70%의 경비를 분담하기로 했고, 그때까지 투자액만 해도 14억불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당시 남북 간 철도도 다 부설됐는데 개통도 못하고 말았어요. 그 후 2·13 합의가 이뤄지기까지 6년이라는 세월을 허송했습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美, 北의 HEU 왜곡은 이라크·베트남 전쟁과 연장선상에 있다”
양 전 대사는 당시 미국이 “북한이 HEU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이유에 대해 경제적인 비용 부담과 이라크 전쟁을 꼽았다.
“클린턴 정부가 체결한 제네바합의는 미국이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게 돼 있어요. 매년 50만 톤의 중유를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제공하게 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2002년 말 기름 값이 1억 불에 달할 정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의회에서 예산 승인을 받아야 하는 부시 행정부로선 골칫덩어리일 수밖에 없었죠.”
그는 또한 “2003년 3월부터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에 한반도에 더 이상 포커스를 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양 전 대사는 북한의 HEU에 대한 과장은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을 때 가장 큰 초점은 ‘대량살상무기’였죠. IAEA(국제원자력기구) 조사에서 없다고 했는데도 개전을 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대량살상무기는 없는 것으로 드러났죠. 또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적극 개입해 확전을 한 계기가 된 건 1964년에 있었던 ‘통킹만 사건’입니다. 이것도 조작·과장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양 전 대사는 지난달 초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6자회담의 성과를 언급하며, 남북·북미 관계가 진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2·13 합의는 의미가 큽니다. 포괄적으로 한반도가 준전시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바뀔 기반도 마련됐고, 북미·북일 관계가 정상화될 수 있는 틀도 조성됐으니까요. 비온 다음에 땅이 굳어진다고 앞으로 잘되길 바랍니다.”
한편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1일 북한의 HEU 프로그램과 관련한 美정보 당국의 평가에 대해 ‘과장 의혹’을 일제히 제기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이 활발한 HEU 프로그램을 가졌다고 오랫동안 단언해 온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물러서고 있다”며 “이는 일부 전문가로 하여금 2002년 북핵 2차 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정보에 결함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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