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6일 뉴욕에 있는 저팬 소사이어티 강연 및 질의응답을 통해 ‘2·13 베이징합의’와 5일부터 시작된 북-미 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담 진행과정을 밝혔다.
힐 차관보는 전날 뉴욕에서 있었던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의 북-미 회담에 대해 “매우 분위기가 좋았다. 북한이 이번 기회를 놓치면 더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회담은 이제 시작 단계이기 때문에 (북-미 관계 정상화까지는) 갈 길이 멀고, 따라서 ‘승리의 미소’를 미리 지을 생각은 없다”고 하면서도 “다음 회의 때에는 북한 측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힐 차관보는 북-미 협상 전망에 대해 “앞으로도 미국과 북한 간에는 계속 이견이 도출되겠지만 일단 출발이 좋다”고 평가했다.
힐 차관보는 2·13 합의에 따른 영변원자로 폐쇄와 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등의 조치가 조속히 이뤄지길 기대한다면서 영변 원자로가 ‘더는 존재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힐 차관보는 ‘2·13 베이징합의’에 대해 일각에서 비판이 제기되는 것과 관련해 “흥미로운 점은 보수파와 진보파 양측이 이번 합의에 대해 ‘1994년 제네바합의와 다를 게 없다’고 비판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제네바합의는 미국과 북한 양자 합의인 반면 이번 합의는 다자간 합의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며 “특히 이번에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공조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측면으로 협상 내용의 이행 가능성을 훨씬 높이고 있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꼭 핵 문제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 견고한 평화 구조를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좀 더 광범위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도 차이점이라고 덧붙였다.
힐 차관보는 ‘2·13 합의’ 성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관계 당사국들이 30일, 60일 등 순차적으로 정해진 데드라인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자금 동결 해제 문제는 미국 재무부가 정해진 기한(30일) 안에 결론을 내려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힐 차관보는 ‘미국 행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가 북한의 변화를 초래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 질문은 북한 측에 물어봐야 할 것”이라며 “북한이 핵실험으로 외부 고립이 심화되고 빈곤이 더욱 가속되는 상황에서 핵무기가 이른바 ‘체제보장 수단’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의 핵문제와 관련해 ‘레드라인’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핵을 테러리스트 등 국가가 아닌 단체에 넘기는 것이 ‘레드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레드라인은 그 선을 넘으면 그에 대응하는 행동이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힐-김계관, 예상밖 4시간 넘게 ‘탐색전’
5일 오후 미국 뉴욕시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한국과 일본 취재진은 물론 CNN, 폭스뉴스, 알자지라 방송 기자 등 모두 100명이 넘는 취재진이 영하의 날씨 속에 정문과 주차장으로 통하는 입구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날 오후 5시 반부터 이 호텔 내 유엔 주재 미국대사관저에서 시작될 북-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첫 회의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일본 방송사는 위성중계차까지 동원해 상황을 속속 생중계할 만큼 북-미 양자 접촉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미국 정부는 이날 국무부 소속 경호원은 물론 뉴욕 경찰과 호텔 경비원까지 동원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는 평소 스타일과 달리 이날은 아예 ‘호텔 잠입’을 시도했다. 비록 기자들에게 들켰지만 힐 차관보는 택시를 타고 기자들 사이를 그대로 지나쳐 주차장과 연결된 호텔 출입구 앞에 내린 뒤 회담 장소인 호텔 내 유엔 주재 미대사관저로 직행했다.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 차량이 도착할 때는 호텔 주차장 한쪽 입구를 아예 뉴욕 경찰차량으로 봉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다른 쪽에서 취재진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날 회담은 개막회의에 이어 저녁식사를 하는 정도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론 시작한 지 4시간이 훨씬 넘은 오후 10시 5분경에야 북측 대표인 김 부상이 호텔 밖으로 나왔다.
김 부상은 반주를 꽤 마신 듯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또 밝은 표정이어서 회담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을 것이란 관측을 낳았다.
한편 김 부상은 북-미 협상에 앞서 이날 오전 10시 맨해튼 코리아소사이어티에서 비공개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해 헨리 키신저,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회 의장 등과 의견을 교환했다.
이날 비공개 세미나에서 여러 미국 측 인사들은 김 부상에게 “이번 북-미회담의 기회를 놓치지 말 것”을 촉구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6일 전했다.
에번스 리비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은 “핵 문제, 국교정상화, 납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현안을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그레그 의장은 “김 부상이 협상에 매우 적극적이고, 이번에는 뭔가를 해보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미국과 북한이 이번 기회를 잘 살리기 바란다”고 말했다.
뉴욕=공종식 특파원 kong@donga.com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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