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관 부상이 6박 7일간의 방미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2·13합의 이후 후속조치의 하나인 북-미 관계 정상화를 논의하기 위해 이뤄진 김 부상의 방미는 오랜만에 미국과 북한 간에 활발한 외교적인 노력을 보여 주었다.
김 부상은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에서 공식 북-미협상 이외에도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과 회동하며 활발히 의견을 나누었고, 미국은 예상을 넘어선 경호와 의전으로 예우를 갖춰줬다.
무엇보다도 이번 방미를 통해 미국과 북한 모두 관계정상화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매우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고, 이를 달성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음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북-미 관계 정상화에 희망을 갖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이 북한을 보는 인식이 1994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제네바합의에도 관계 정상화가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당시 미국은 북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북한이 가장 실망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반면 미국은 이제는 북한이 짧은 시일 내에 붕괴할 것이란 전제를 갖고 있지 않다. 북한을 ‘악의 축’이나 ‘폭정의 전초기지’ 등으로 규정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북한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1994년과 큰 차이가 있다. 북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북-미 관계 정상화는 대체로 3단계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첫 번째 단계는 미국 정부가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법률적 제도적 장치를 해제하는 것, 특히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외교관계 수립이며, 마지막 단계는 두 번째 단계와 병행하여 이뤄질 수도 있는데, 비정부 차원의 교류, 즉 경제, 학술적 교류 등을 강화하여 두터운(thick)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김 부상의 방미로 비핵화와 관계 정상화의 모멘텀이 생긴 것은 매우 중요하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북한과 미국 간에 신뢰를 쌓는 일이다. 양국 모두 서로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에 합의가 하나씩 이행되면서 점진적으로 양국 간에 신뢰가 생겨야 한다. 그간 쌓아 온 노력이 한순간의 실수나 불신으로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김 부상이 간담회에서 가장 강조한 것 중 하나가 북-미 간 신뢰였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은 핵 프로그램과 핵무기를 분리하여 접근하고 있으며, 2·13합의는 핵시설·프로그램에 국한되어 있다. 영변 핵시설의 경우도 가동 불가능한 상황까지 가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의혹도 여전히 남아 있다. 핵무기의 완전제거는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이 이루어진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경수로 문제도 현재는 중요 논의대상이 아니지만 북한으로선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심각한 에너지난을 겪고 있는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대가로 경수로 지원을 요구할 것이다. 한국 정부의 ‘중대한 에너지 제안’은 북한 처지에서 보면 단기적으론 도움이 되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여론의 향배도 변수가 될 수 있다. 비핵화를 북-미 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하자는 미국 내 의견도 만만치 않으며, 이는 관계 정상화만이 비핵화를 이룰 수 있는 최상의 방법임을 내세우는 북한의 주장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일본은 미국이 북한을 테러국에서 제외할 경우 납치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가능성을 우려할 것이다. 또한 북-미 관계 정상화는 한반도에서 냉전체제의 해체를 의미하며 한미동맹 등 기존 안보체제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 관계 정상화는 한반도 비핵화는 물론 동북아 평화체제 확립에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며, 지금은 정상화의 모멘텀을 이어갈 때이다. 이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답방하는 형식으로 평양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미국과 북한 모두는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 모멘텀을 살리지 못한 채 여러 해를 반목과 갈등 속에 지내야 했던 경험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2·13합의와 김 부상의 방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보여 주었던 ‘조용한’ 외교는 평가할 만하며 그 같은 기조가 유지되어야 한다. 특히 남북관계는 북-미 관계 등 현재 논의되고 있는 다른 이슈들에 비해 훨씬 진전되어 있으므로 속도조절을 할 필요가 있다.
1994년과 달리 2·13합의는 비핵화 과정을 순차적으로 이행한다는 데 그 핵심이 있다는 점을 한국 정부도 명심해야 한다. 미-중-일 등 핵심국가들과 협조하면서 협상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관리하는 ‘조용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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