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의 북한 계좌 전액 반환 결정은 부시 행정부 내 기류에 정통한 한반도 전문가들조차 ‘가능성은 있지만 설마…’라고 생각했던 시나리오가 현실화된 것이다.
이번 결정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이 치밀한 중장기 계획과 포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여실히 보여 줬다.
1월 베를린 회동에서 북한 측에 암묵적으로 ‘해결 약속’을 해 준 국무부는 그동안 재무부 측에 여러 차례 협조를 요청했다. ‘마카오 당국에 다 위임하는 형식을 취하자’는 방안도 재무부의 체면을 살리는 차원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재무부는 “대량살상무기 관련 자금까지 풀어 줄 수는 없다. 우리가 (전액 해제를 원하는) 마카오 당국을 설득하겠다”며 막판까지 전액 해제에 반대했다.
그러나 17일 베이징에 도착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이 “전액을 해제하기 전에는 핵시설 가동 중단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사실상 ‘칩거’에 들어가자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다시 재무부에 협조를 요청했고 결국 “인도주의적 목적에 사용한다”는 중재안을 갖고 백악관이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미 행정부 관리는 이날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에겐 6자회담이 훨씬 중요하다. 적은 액수의 돈이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게 할 수는 없었다”고 설명했다. 재무부 관리들은 못마땅해했지만 원칙 포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사실 BDA은행 조사는 딕 체니 부통령을 비롯한 강경파의 작품이었다. 재무부의 조사 자체는 불법 자금의 경로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시작됐지만 중간보고를 받은 체니 부통령이 강력히 힘을 실어 줬다. 군사력 동원 없이도 북한을 압박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겼던 것. 북한이 BDA은행 조사를 이유로 6자회담의 판을 깨자 국무부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재무부의 고위 관리는 “백악관이 우리의 작업을 좋아한다”며 일축할 정도였다.
이처럼 시작부터 정치적 요소가 많았던 BDA은행 이슈는 마무리도 원칙보다는 정치적으로 결정됐다. 앞으로 강경파들 사이에서 “대량살상무기 관련 자금까지 풀어 줌으로써 미국 스스로 유엔결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국제 금융계가 북한과 거래를 재개해도 좋다는 신호로 해석할 소지도 크다.
하지만 워낙 부시 대통령이 협상에 힘을 실어 주고 있어 당분간 기조에 변화가 없을 확률이 높다. 특히 앞으로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나 고농축우라늄(HEU)프로그램 이슈에서도 부시 행정부가 예상을 뛰어넘는 태도 변화를 보일 수 있다. ‘핵시설 동결→불능화→핵무기·핵물질 반납’ 등 비핵화 달성의 핵심 이슈를 제외한 사안들은 과감히 양보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HEU프로그램의 경우 현재진행형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되면 설사 북한이 HEU 추진 역사에 대해 축소 신고를 한다 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그럴 경우 ‘원칙 실종’을 둘러싼 미국 내의 논란도 한층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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