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찾아 시베리아 가로지르는 北근로자들

  • 입력 2007년 3월 20일 03시 00분


북한의 화물열차가 러시아에서 목재와 연료를 싣고 16일 두만강을 건너고 있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낡아 열차는 시속 5km 미만의 속도로 느리게 운행되고 있다.(위) 북한과 이어진 러시아 철도. 러시아와 북한 철로는 궤도 너비가 다른 까닭에 열차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광궤와 협궤, 표준궤도 등 다양한 철로가 깔려 있다. 하산=정위용  특파원
북한의 화물열차가 러시아에서 목재와 연료를 싣고 16일 두만강을 건너고 있다. 두만강을 가로지르는 철교가 낡아 열차는 시속 5km 미만의 속도로 느리게 운행되고 있다.(위) 북한과 이어진 러시아 철도. 러시아와 북한 철로는 궤도 너비가 다른 까닭에 열차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광궤와 협궤, 표준궤도 등 다양한 철로가 깔려 있다. 하산=정위용 특파원
“밥은 먹고산다니…” 8000km 타향살이

16일 오후 2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육로로 300km 떨어진 두만강 철교.

북쪽 멀리서 북한 화물열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러시아 국경을 넘는 기차는 경적과 바퀴소리가 요란했지만 사람이 빠르게 걷는 정도의 시속 5km로 쉬엄쉬엄 다가왔다.

화물차에 달린 4개 짐칸 중 첫 칸에는 러시아산 목재가 실려 있었다. 국경지대에서 30개 이상의 짐칸을 달고 다니는 러시아 열차에 비하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열차가 다리를 건너자 두만강 제방 남쪽의 북한군 초소에서 병사 두 명이 나왔다. 소총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눈 덮인 벌판에서 두만강 너머 러시아 쪽을 바라보며 초소 주변을 순찰했다. 은백색 벌판을 배경으로 초소 옆의 검은 철책이 유난히 선명했다. 하산의 러시아 주민들은 “두만강을 건너 탈출하는 북한 주민들을 막기 위해 세운 철책”이라고 말했다.

서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가동을 중단한 크레인과 하수관이 보였다. 크레인 남쪽으로는 포장되지 않은 2차로의 도로가 나 있었다. 러시아 안내인들은 “언젠가 저 도로가 러시아 하산지역이나 중국 훈춘과 연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로 오는 북한 열차들이 처음 맞는 하산 역은 국경 철교에서 2km 떨어져 있다. 궤도가 달라 대부분의 북한 열차는 이곳이 종착역이다. 2001년 7월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러시아를 방문할 당시 이곳에서 전용열차의 객실을 옮겨 갈아탔다.

역 게시판에는 ‘여권과 비자를 들고 가라’는 내용의 한글 안내문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다. 40평 남짓한 대합실 안에는 남루한 차림의 북한 근로자 3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이곳 출입문 3개 가운데 2개가 잠겨 있었다. 하산 역 여자 역무원에게 출입문이 잠긴 이유를 묻자 “그들(북한인)에게 물어보라”며 빙긋 웃었다.

잠긴 문 쪽에 앉아 있던 근로자 4명은 손때 묻은 카드 패를 돌리고 있었다. 다른 쪽에서는 2명이 마주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몇몇 근로자를 빼고는 모두 장거리 여행에 지친 듯 대합실에 마련된 간이 의자에 드러누워 있었다. 5명의 북한 간부가 이들을 지켜봤으나 게임에 빠져 있던 근로자들은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는 듯했다.

김일성 배지를 단 감시 요원이 들어서자 실내가 잠시 조용해졌지만 게임은 그치지 않았다. 검은색 상의를 입은 요원은 허름한 차림에 세수도 하지 않은 근로자들과 달리 얼굴도 말쑥했다.

대합실을 빠져 나와 담배를 피우던 근로자 3명과 만났다. 짙은 색 잠바를 입고 모자를 쓴 한 근로자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오늘 아침에 왔다”고 말했다.

‘가는 곳이 정해졌는가’라고 묻자 일행은 “고리키(니즈니노브고로드)로 갑니다”라고 답했다. 열차로 니즈니노브고로드에 가기 위해서는 중간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갈아타고 무려 8000km를 더 달려야 한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다는 한 근로자는 “오늘 저녁 우수리스크에서 기차를 다시 갈아타고 고리키 합숙소로 떠난다”며 독한 담배연기를 뿜어냈다.

이들의 굳은 표정에는 멀고 낯선 땅으로 가는 두려움이 어른거렸다. 하산과 가까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지 못해 아쉽다고 털어놓은 한 근로자는 “고리키는 여기보다 춥지 않습니까”, “건설장 주변은 밤에 걸어 다녀도 아무 탈이 없습니까”라며 계속 질문을 해댔다.

일행 중 헤어진 북한 군복을 입은 한 근로자는 ‘한 달에 얼마를 받기로 했느냐’고 묻자 “현지에서 먹고살 만큼은 번다고 들었다”고 했다.

10여 분 동안 함께 담배를 피우며 순조롭게 대화가 이어졌다. 몇몇 근로자는 “북조선에 가족을 두고 있다면 빨리 편지를 보내 만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화는 파란색 운동복을 입은 북한 요원이 밖으로 나오자 갑자기 중단됐다. 요원이 기자 일행의 외모를 눈여겨보며 “동포가 왔네”라고 한마디 하자 근로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대합실로 다시 들어갔다.

이곳을 통과해 연해주로 들어가는 북한 노동력이 얼마나 많은지는 접경 지역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하산 역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러시아 크라스키노 마을 주택 건설 현장에서도 일자리를 찾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내려 온 북한 인부 4명이 시멘트를 분주하게 나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날 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러시아 택시운전사는 “북한 근로자들 일당이 러시아인의 절반 수준”이라며 “지역 일간지 광고란에는 상급자 없이 개별적으로 일하는 북한 근로자들 연락처가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시내에서 만난 러시아 건설업자도 “러시아 개인 주택 보유자들은 집수리를 할 때 저렴한 북한 인력을 많이 찾는다”며 “주말에도 북한 근로자를 불러 일을 시키고 현금을 직접 주면 매우 좋아한다”고 전했다.

하산=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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