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을 위해 희망을 찾아 떠났고 모든 것을 바쳤지만 결과는 가슴을 꿰뚫는 비수로 돌아왔다. 리어왕의 슬픔도 이보다 크지 않을 듯싶다.
아낌없는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주는가.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우화적 영역에서만 유효한 결론이다. 현실에서는 정밀한 계산과 전략이 동반된 사랑이 성공을 거둔다. 아니면 운에 맡겨야 할 뿐이다. ‘사랑=보답’이라는 아름다운 등식도 이상(理想)에 그쳐야지 교조의 차원에 돌입하면 좌절을 겪기 쉽다.
우리가 오랫동안 ‘맏형 의식’으로 책임감을 느껴 온 북한 문제도 다를 바 없다. 따뜻한 햇볕을 쬐어 주면 상대가 겉옷을 벗을 것이라는 건 기대다. 기대를 현실화하기 위해 전략과 계산이 필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엊그제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한 강연회에서 “옛 서독의 경우 동독을 지원할 때 제3국을 통하는 방식으로 동독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소개했다. ‘퍼 준다’는 말로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며 한 말이었다. 상대의 기분까지 배려하는 사랑 가득한 자세에 사뭇 감탄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서독의 지원은 어떻게 진행됐던가. 그것은 철저히 ‘주는 만큼 받는’ 협상을 통한 것이었다. 서독은 돈을 주고 1983년까지 2만 명 가까운 동독의 정치범을 빼냈다. 1984년 한 해 동안 서독으로 이주를 허락받은 노령자만 4만 명에 달했다. 1961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150명 이상의 동독 주민이 서독 경계를 넘다 사살됐지만 1972년 기본조약 후 통일에 이르기까지 17년 동안은 피살자 수가 10명 남짓에 불과했다.
우리는 어떤가. 국내외의 기대를 모았던 6·15 남북정상회담이 7주년을 바라보지만 북한 주민의 열악한 인권, 참담한 생활상 어느 것 하나 개선된 것이 없다. 성과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을 말한다. 한번 들여다보자. 북쪽이 상응하는 양보를 한 것은 없다. 남쪽이 ‘드린’ 것일 뿐이다.
받아 주셨다고 칭송까지 하니 상대방의 배짱만 커 간다. 급기야 남쪽 행사에 참가하는 북한 단체가 남측 파트너에 엄청난 참가비를 현금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정치권의 움직임도 어처구니없다. 2·13 합의 이행은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여권은 벌써 북한 특수를 노린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방북단을 구성하고 나섰다. 변화의 움직임 없이 눈물겨운 손짓만 이어지는 형국이다. 방북단은 ‘남북 경제공동체’를 만들어 북한의 개방과 동북아 평화 안정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개방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자존심’ 강한 저쪽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하다.
보답을 받지 못한 사랑을 하게 될까 두렵다. 준 만큼 받아야 한다는 이해타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노력이 허망해졌을 때 갖게 될 상실감 때문이다. 사랑을 주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결실을 볼 사랑을 주자는 것이다. 상대가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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