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북측과 추진에 합의했다”고 밝힌 사업에는 신(新)황해권 경제특구 추진, 해주시 주변 중공업단지 조성, 농업교류를 위한 평양 농업기술센터 개설 검토, 7월 평양 대토론회 등도 포함돼 있다. 하나같이 남북장관급회담 정도는 열려야 합의, 추진될 수 있는 대규모 사업들이다.
김 의원은 실체도 분명치 않은 열린우리당 동북아평화위원회 남북경제교류협력추진단장 자격으로 방북했다. 열린우리당 의원 4명, 농협중앙회 축산 대표이사, 대한석탄공사 사장 등과 함께 간 그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을 만났다. 공식 회담도 아니고 방문단에는 정부 당국자도 없었다. 정부 관계자도 “정부와 공동 추진하거나 공감대를 이룬 사업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렇다면 김 의원이 ‘남북한 양측’이라고 말한 합의 당사자의 실체는 뭔가. 남북한 당국 간에 합의가 됐어도 실현이 어려울 사업들을 여당 의원도, 장관도 아닌 김 의원이 합의했다면 구속력이 있을까.
김 의원은 합의했다는 북한 측 인사들이 누군지, 그들이 합의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지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남북정상회담 추진용이거나 자신의 대선 출마 홍보용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노무현 대통령이 친노(親盧) 진영의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을 띄우기 위해 남북을 아우르는 대선용 ‘그랜드 디자인’을 하고 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이해찬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최근 행보를 보면 북한 문제를 대선에 이용하려는 여권의 치밀한 전략이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정치권에선 1월 이후 북한에 다녀온 의원이 56명이나 될 정도로 방북 러시가 한창이다. 12월 대선과 내년 4월 총선 때에는 김 의원처럼 북한 고위층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홍보물에서 적지 않게 볼 것 같다. 어쩌다 지구상 최악의 세습 독재자나 그 하수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자랑거리가 됐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정치인들의 방북 러시는 북한에 대한 환상과 착시현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북핵 폐기를 위한 6자회담 2·13합의가 석 달이 다 지나도록 아무 진전이 없는데도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국민이 착각할 수 있다. 당국 간 회담과 정치인 방북 러시에 묻혀 지난해 10월 북한이 핵실험한 사실조차 잊히다시피 하지 않았는가.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4일 “한국이 포용정책만 하다 보면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평화를 침해해도 평화 분위기만 진작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적시에 나온 옳은 지적이다. 정부는 퍼 주기와 저자세로 북한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아직 모르나.
정부와 정치인들이 정상회담을 위해서든, 개인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서든 북한에 잘 보이기 경쟁을 하고 있는데 북한이 무엇이 아쉬워 협상하고 양보하겠는가. 남녀 간 연애도 대등한 조건에서 서로 양보하고 요구해야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일방적 구애나 희생이 관계를 그르치는 건 남북관계라고 다를 게 없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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