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윤영찬]2007년 5월 평양

  • 입력 2007년 5월 15일 03시 01분


5일 평양엔 비가 내렸다. 남측 종교인평화회의(KCRP)와 북측 조선종교인협의회(KCR) 교류 10주년을 기념한 평양 방문에 동행한 길이었다. 어스름한 안개에 땅거미가 스멀거리는 텅 빈 도로를 남측 방문단을 태운 버스가 질주했다. 순안공항에서 평양시내까지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 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 한 손에 우산 들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차창 밖으로 스쳐갔다.

문득 21년 전 여름의 단상이 떠올랐다. 운동권 주변부의 대학생이었던 기자는 설악산 대청봉을 찾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의 기다시피 올라간 정상에서 한 친구가 북녘 땅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해방의 땅!” 살얼음 같던 내 신념의 구들장이 날카롭게 ‘쩍’ 갈라진 것도 그때였다.

2007년 5월의 평양은 봄과 겨울이 교차하고 있었다. 적어도 난생처음 평양을 찾은 기자의 눈에는 그랬다. 이를 비교할 선험적인 기준도, 수치화할 만한 교본도 물론 없다. 그날 밤 5·1경기장에서 수만 명이 동원된 집체극 ‘아리랑’을 보며 기자는 박수를 칠 수도 안 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앙증맞은 아이들의 모습에 손이 올라가다가도 빗줄기에 흠뻑 몸이 젖은 채 바닥을 뒹구는 아이들이 안쓰러웠다.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나…. 초등학생 아들 녀석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암만 생각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호텔에서 북한 드라마를 봤다. 나라에서 제공한 아파트를 예쁘게 꾸밀 것인지 말지를 놓고 부부가 티격태격했다.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며 아내를 타박하는 남편.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는 아내. 남편은 동생 집에 들렀다 이 문제로 동생과도 틀어진다. 갈등이 고조된 시점, 동생의 직장 동료들이 잘 꾸며진 동생 집을 견학하기 위해 들이닥쳤고, 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집에 돌아간 남편에게 부인은 말한다. “집을 아름답고 문화적으로 꾸미고 사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평양시내 외국인 전용 잡화점. 한복 입은 ‘안내원 동무’가 물건 파는 데 열심이다. “혈전을 없애는 데 아주 좋은 약입니다.” “이 술 먹으면 남성분들 무병장수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손님이 오든 말든 데면데면했다는 안내원들은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선전에 열을 올렸다. 옥류관 옆에서 솜사탕을 팔던 아낙은 신기한 듯 바라보자 북한 돈 50원짜리 솜사탕을 거저 주었다.

북측 인민들의 생활 속에 경제와 문화 관념이 심지내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입’과 ‘구호’만큼은 도무지 넘어서지 못할 벽이었다.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 ‘경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등의 ‘접두어’는 예상했지만 “세상은 주체사상의 이념으로 무장한 우리 북조선을 중심으로 돌고 있습니다” “여기가 지상낙원입니다”라는 지독한 ‘관계결핍증’ ‘자폐증후군’은 나흘 동안 기자의 가슴을 콱 막히게 했다. 약속을 깬 기습적인 정치선전엔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아직껏 북한을 가 보지 못한 그 친구에게 이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이 어떠하더라고. 그런데 그 친구는 북한에 더는 관심이 없다. 과거 반독재투쟁의 선두에 섰던 그는 요즘 아이의 과외비를 벌기 위해 생활전선 최선봉에 서 있다.

윤영찬 문화부 차장 yyc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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