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한국 좌파의 새로운 역사적 ‘원죄’

독일의 현대사를 알면 한국의 현대사가 보인다. 1945년 이후 독일과 한국에서는 좌익 진영의 세 규합을 위한 두 개의 큰 공작이 있었다.

하나는 수많은 정치 사회 단체를 한 울타리 안에 결집시킨 광범위한 ‘민족전선’의 결성이다. 독일에서는 1945년 6월 소련군 점령지역에 나치와 파쇼 세력을 제외하고 우파까지 아우른다는 ‘반(反)파쇼 민주주의’ 제정당의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됐다. 한반도에서는 1946년 2월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를 망라한다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이 결성됐다. 소련 점령지역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불가리아의 공산당 지도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이론화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혹은 ‘인민공화국’ 수립 전략의 일환이다.

다음은 지지도가 낮은 공산당과 지지도가 높은 사회(민주)주의 정당과의 합당 추진이다. 독일에서는 1946년 4월 동쪽 지역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합당이 소련군 점령 당국의 강압으로 이뤄져 ‘사회주의통일당’을 발족시켰다. 그러나 서독의 사민당은 공산당의 합당 제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쿠르트 슈마허 당수의 위대한 역사적 ‘나인!’(거절)이다.

공산당에 꼼짝못하는 한국좌파

한반도에서는 먼저 북에서 1946년 8월 말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 노동당으로 탈바꿈했다. 그 뒤를 이어 남에서도 박헌영의 공산당, 여운형의 인민당, 허헌의 신민당의 합당 문제가 제기됐다. 협상은 그해 11월 일단 매듭짓게 되나 3당 합당으로 한 당 아닌 두 당이 탄생했다. 급진 좌파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노동당(남로당)과 온건 좌파의 여운형이 곡절 끝에 다음 해 1월에 발족시킨 근로인민당(근민당).

그해 7월 여운형의 암살로 근민당이 중심을 잃고 와해되면서 남한에서는 급진파에서 온건파에 이르는 모든 좌익이 공산당이 주도하는 남로당에 몸을 맡겨 버리고 말았다. 그 남로당이 북로당과 합작해 평양의 인공 정권을 수립하고 이내 6·25 남침전쟁을 일으켰다.

남한의 여러 갈래, 여러 빛깔의 온건 개혁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팽개쳐 버리고 공산당과 합당해 버림으로써 ‘초록은 동색’이 돼 버린 3당 합당을 나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원죄(原罪)’라 보고 있다.

3당 합당은 이후 한국에선 서유럽의 좌파와는 달리 ‘공산당과 싸우는 좌익’이 존재할 수도, 인정될 수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랬기에 심지어 유신독재 체제하에서도 민주화 투쟁에 ‘좌익’은 나설 수도, 끼어들 수도 없었다.

물론 역사적인 원죄는 아담의 종교적인 원죄와는 달리 ‘시효’가 영원하지 않고 제한적이다. 한국 좌파의 원죄는 뜻밖에도 1980년 신군부에 의한 ‘광주의 피’가 씻어 주었다. 많은 국민, 특히 6·25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의 눈엔 국민을 살육하고 권력을 찬탈한 군부의 수장들이 청와대를 나올 때마다 수천억 원씩 비자금을 챙겨 나오는 걸 보고 그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의문에 부치는 새로운 좌파의 등장을 막지 못했다고 나무랄 수 있을까. 만일 오늘의 386 정권을 보수 진영에서 일컫듯 한국의 좌파 정권이라 한다면 그 길을 열어 준 가장 큰 공은 1980년대의 신군부에 있다 해서 잘못일까.

일부에서는 한국의 좌파 정권이 앞으로도 10년은 가리라 내다보기도 했으나 그럴 것 같지는 않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1990년 동유럽 소비에트 체제가 총체적으로 붕괴된 이후 어렵사리 30여 년 만에 복권한 좌파가 이내 북의 세습 독재체제와 내놓고 ‘앙탕트 코르디알(심정적인 우호협상)’을 맺고자 하니….

좌파라면 北인권 외면말아야

우파가 기득권을 지키고 현재에 집착한다면 좌파는 기득권에 도전하고 미래를 지향한다. 한반도의 남북한을 통틀어 지키고자 하는 가장 방대한 기득권이 평양의 김씨 세습 왕조 말고 또 있는가. 남한의 좌파가 그 기득권을 지켜 주려 한다면 그러고도 좌파의 명분이 서는가.

우파는 가진 자의 권익을 옹호해 주는 데 반해 좌파는 못 가진 자의 인권을 변호한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가 북한 주민이다. 그들의 인권에 대해 언급조차 막으려는 남한의 좌파가 그러고도 좌파라 할 수 있을까. 도대체 그들은 평양 체제에 ‘미래’가 있다고 보는가.

평양 권력집단을 위한 남한 좌파의 앙탕트 코르디알, 그건 한국 좌파의 새로운 역사적 원죄가 되지 않을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