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표는 1988년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13대 총선 때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상식적으로 보면 DJ의 뜻을 거역하기가 어려운 처지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검사 시절의 강직함과 고집을 정치인이 돼서도 버리지 않았다. 오죽하면 ‘소신 9단’이란 소리를 들었을까.
몇 가지 사례를 보자. 1995년 초,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에 갔다 돌아온 DJ가 정계 복귀의 수순으로 당시 이기택 씨가 이끌던 민주당에서 분리해 국민회의를 만들려고 했을 때 박 대표는 10가지 이유를 대며 반대했다. DJ 집권 직후 초대 법무장관 때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를 사면하려 했던 DJ의 뜻을 꺾기도 했다.
4일 합당이 결정된 민주당과 통합신당(열린우리당의 한 분파) 간의 통합 과정에서도 그는 DJ가 원하는 길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DJ의 생각은 대선에서 한나라당에 맞서 이기려면 범여권 모두를 아우르는 대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국정(國政) 실패의 핵심 책임자들까지 받아들이면 ‘도로 열린우리당’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정당이란 이념과 정책노선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결사체여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래서 들고 나온 게 중도개혁통합론이다.
그는 DJ의 면전에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이를 관철했다. 그의 이런 ‘배짱’은 어디서 나온 걸까. 주변 사람들은 그에 대한 DJ의 신뢰를 꼽았다. ‘법안 제조기’로 불릴 만큼 성실하고도 능력이 출중한 데다 사심(私心)이 없고, 원칙에 입각해 논리적으로 소신을 펴기 때문에 그가 비록 다른 말을 하더라고 DJ가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다른 이유를 들자면 비록 자신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일단 대세가 결정되면 받아들이는 ‘대세 순응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가령 국민회의 창당에 반대했지만 내부 협의를 거쳐 창당 쪽으로 결론이 나자 이를 받아들였고, 창당준비위 기획위원장까지 맡았다. 이런 자세는 정치인으로서 장점이기도 하지만 또한 한계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특정 인사 배제론’을 굽히지 않다 결국 합당 합의문에는 이를 명기하지 않는 데 동의하더니 6일엔 “새 정당의 통합 원칙과 기준은 합당 기본합의서를 근거로 새로 설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DJ의 뜻과 다르게 소통합을 이뤘으나 대세가 대통합 쪽으로 흘러가자 문을 넓히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대통합론은 ‘잡탕’이라도 좋으니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하나로 뭉치자는 주장이다. DJ가 ‘야합’이라고 비난했던 1990년의 3당 합당과 다를 바 없다. 정당정치의 기본을 들어 이에 반대한 박 대표는 결국 DJ에게 굴복하고 만 것인가. 정치에서 소신을 지키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범여권의 ‘통합 놀음’이 어떻게 흘러가든 박 대표의 당초 소신이 흔적이라도 남기를 기대해 본다.
이진녕논설위원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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