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국민이 그리 만만한가

  • 입력 2007년 6월 7일 19시 25분


사춘기가 지난 사람이라면 사랑의 허망함을 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하는 것도 이를 알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흔들 수 있다. 법과 제도는 이를 막기 위해 존재한다. 더 민주적이라는 세력이 법과 제도를 흔들 경우에 대비해 우리나라는 헌법재판소도 두었다. 여기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까지 5부가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맡는다.

대통령의 자유 위해 ‘노무현維新’?

선관위는 어제 대통령이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정했다. 자칭 세계적인 대통령이니만치 다른 건 빼먹어도 민주주의 흔들기라는 세계적 흐름에선 빠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가 선거인데, 대통령은 그 선거법을 흔들었다. 막강한 정부 권력은 법과 제도, 헌법을 통해 제한받아야 한다는 게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에서 자유의 의미다.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자유가 ‘그놈의 헌법’ 때문에 제한받는다고 억눌린 민초처럼 한탄했다. 억울하면 ‘그놈의 헌재’로 달려갈지 모를 일이다.

이런 사고를 지닌 대통령이 작년 방문 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성공시키고 있는 지도자들’이라고 치켜세웠던 나이지리아는 지난달 타임지에서 ‘글로벌 민주 후퇴’ 추세의 맨 앞에 꼽혔다. 부정선거로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게 그 이유다. 공산주의 붕괴 뒤 민주주의로 돌아선 동유럽은 나라와 민족의 이름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해 ‘볼셰비키의 얼굴을 한 반공국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당과 언론의 목을 조여 정치적 반대의 확산을 막는 러시아나 베네수엘라는 말할 나위도 없다.

1980년대와 90년대 신생민주주의를 잇달아 탄생시킨 ‘제3의 물결’과 상관없이, 혼자 잘나 민주주의를 쟁취한 듯 으스대던 우리의 민주화 세력이 ‘거꾸로 민주화’ 흐름을 탔다는 건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다. 만에 하나, 퇴임이 코앞인 대통령의 자유를 위해 법과 제도는 물론 헌법까지 재고해야 한다면 비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말도 과분해진다. 과거 유신헌법 뺨치는 ‘노무현 유신’이 필요할 판이다.

글로벌 민주 후퇴로 내달리는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시장(市場)과 법치(法治)를 무시하는 반(反)세계화 정책으로 유례없는 세계적 호황에 못 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고도 국민 속이기를 밥 먹듯 해서, 지난해 간신히 좌파 재집권에 성공한 헝가리에선 “우리가 경제 현실을 밤낮 거짓말했다”는 총리 발언이 공개돼 난리가 났다.

대통령은 어제도 “시장의 힘이 커지고 그 시장은 여론의 영향을 받는다”며 언론 수준이 낮아 나라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바로 그 세계화 시대에 안 맞는 시장 억누르기 정책으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좌파 이념에 사로잡혀 ‘되는 정책’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힘없는 사람의 연대와 참여를 중시하는 게 합리적 진보”라지만 그 결과 힘없는 사람은 더 힘들게 됐다. 이쯤 되면 집권 좌파는 무능한 게 아니라 무지막지하다고 해야 한다.

3류 정치가 市場과 法治못 흔든다

지난해 이언 마시 호주 시드니대 교수의 아시아 7개국 국민 정치의식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정치적으로 가장 활동적이고도 정치적 효율성에 민감했다. “맞습니다, 맞고요”에 둘러싸인 대통령이 우리 국민은 ‘국영언론’을 더 믿는다고 믿더라도 착각은 자유이니 할 수 없다.

우리가 숱한 정변을 겪고도 세계사에서 유례없이 짧은 시간에 경제 규모 12위를 이룩한 것은 집권세력이 운동에 열심일 때 더 열심히 일하고 공부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장은 아직 견딜 만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법과 제도는 그래도 살아 있다. 정권 말기에 또 뭔가를 헌법처럼 고치기 어렵게 만든대도 헌재는 결코 죽지 않았다. 무식한 좌파의 시대는 갔다. 더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국민 무서운 줄 알아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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