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가 힐러리-오바마 비난한다면 美 뒤집힐것”

  • 입력 2007년 6월 9일 03시 08분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중립의무 위반 결정에 대해 청와대는 “선진국에선 대통령의 정치 발언을 허용한다”며 법적 대응까지 불사하겠다고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사실 미국은 현직 대통령의 선거 관련 발언이 폭넓게 허용되는 사회다. 실제로 2000년 대선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앨 고어 후보를 지지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내년 초 공화당 후보가 확정되면 지지 유세를 다닐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은 법제나 선거문화 풍토에서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미국에선 대통령 선거 때 노골적인 관권 개입이 이뤄진 예가 없다. 표현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 수정헌법 1조에 따라 대통령의 선거 개입 행위를 원천 차단하는 공직선거법상의 정치적 중립 의무와 같은 조항도 없다.》

美 대통령은 정치활동 맘대로 할 수 있나-현지 전문가 5인 인터뷰

7일 본보가 인터뷰한 미국의 전문가들은 미국 대통령의 선거 참여에 관해 이해하려면 이 같은 미국의 헌법과 역사 문화적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에선 A에서 Z까지 모든 것이 헌법정신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가인 피터 버니 조지타운대 법대 교수, 선거법 전문가인 남캘리포니아대 법대 카림 크레이턴 교수, 싱크탱크인 맨스필드재단의 고든 플레이크 사무총장,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연방 하원의원을 지낸 김창준 전 의원, 조지워싱턴대 박윤식 교수 등 5명에게서 미국의 선거법과 대통령의 선거 활동에 대해 들어 봤다.

▽대통령의 선거 개입=버니 교수는 “미국의 헌법정신에 따르면 대통령도 정치적 프로세스 참여자의 한 부분”이라며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 프로세스의 모든 참여자는 선거에 대해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버니 교수는 “따라서 미국에는 (한국처럼) 고위 공직자의 정치 중립을 의무화한 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 수정헌법 1조는 언론 출판 및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은 아예 만들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대부분 정치광고에 쓰이는 선거자금의 상한선까지 두지 않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선거 개입이 무한정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크 사무총장은 “대통령이 연방정부의 자원(인력, 자금)을 조금이라도 개인적 정치활동에 사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선거 때 선심 공약 등의 악습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크레이턴 교수는 “성문화한 법은 없지만 유권자는 언론을 통해 투사된 대통령의 선거 개입 발언의 품위를 따진다”고 말했다. 상궤를 벗어났다면 지지율 하락을 감수해야 한다.

박 교수는 “만약 각 당의 후보가 결정도 안 된 상태에서 대통령이 민주당 예비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의원이나 버락 오바마 의원 등 특정 후보를 대놓고 비판하거나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면 미국 사회도 발칵 뒤집히겠지만 그런 상황은 상상하기 힘들다”며 “표현의 자유가 있으므로 법적 처벌 대상은 아니더라도 정치적인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미국 대통령의 후보 지원은 프라이머리(각 당 후보 선출을 위한 예비선거)가 끝나 후보가 결정된 뒤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이뤄진다”며 “대통령이 소속 당이든 상대 당이든 후보가 정해지기 전에 개입해서 분열시키는 발언을 하는 예는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 “만약 미국에 ‘중립의무 조항’이 담긴 법이 있을 경우엔 어느 대통령도 현행법을 어겨 가며 정치적 발언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플레이크 사무총장은 “미국의 관점에선 대통령이 ‘정치를 초월한 존재’이며 비당파적이고 고귀한 생각만 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하지만 한국 선관위의 결정은 한국 법에 따른 것이므로 그것은 그것대로 당연하고 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조직 문화의 차이=전문가들은 미국 사회가 대통령의 선거 발언을 폭넓게 허용하는 배경의 하나로 대통령의 정치 행위에 좀처럼 공직사회가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플레이크 사무총장은 “대통령의 발언은 ‘순수한 정당 시니어’로서의 활동일 뿐이며 대부분 공무원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누구를 지지한다고 해도 대통령 혼자 지지하는 것”이라며 “만일 재집권을 위해 행정부의 우수한 인재를 빌려 주고 싶다면 공직을 떠나게 한 뒤 그렇게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미국은 공무원 조직의 위계질서가 상대적으로 덜해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정치 행위를 추종할 가능성이 적다”고 말했다. 법치주의가 확립된 미국과 비교할 때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이 나올 만큼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강한 공직문화와 선거철 줄 대기가 심한 한국적 풍토라면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에 대해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신성시되는 헌법=버니 교수는 “대통령도 헌법 조항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매우 신중하고 점잖은 방법으로 문제를 제기한다”고 말했다.

버니 교수는 선거인단제도에 대한 논의를 예로 들었다. 미국의 선거인단제도는 2000년 대선에서 고어 후보가 더 많은 지지표를 얻고도 부시 후보에게 패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버니 교수는 “선거인단 조항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 지도자가 많지만 자기가 이해당사자일 경우 직접 의견을 표명하는 예는 거의 없다”며 “대개 다른 사람들이 대신 의견을 표출하는데 그 형식도 ‘선거인단제도는 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시대 상황에 따라 논의를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식”이라고 소개했다.

김 전 의원은 “대통령은 솔선수범해서 헌법기관을 존중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며 “만약 미국에서 현직 대통령이 헌법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다면 탄핵 사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의원은 또 “미국의 선관위는 행정부 산하 독립기구로 선거자금 문제를 담당하는 기구지만 한국에서는 헌법기관”이라며 “대법원 등 헌법기관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법적 권리가 있는 경우에도 대통령 등 지도자들은 일반 개인에 비해 권리 행사를 극도로 자제한다”고 말했다.

고어 후보는 2000년 대선에서 플로리다 주의 투표용지에 대한 수작업 재검표가 계속되면 선거 결과를 뒤집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이 재검표 중단 결정을 내리자 “겸허하게 수용한다. 미국 법의 힘은 위대하다”면서 승복했다. 전문가들이 꼽은 대표적인 헌법 존중의 사례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김승련 특파원 sr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