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이명박 신화’의 뒤에는 늘 박정희의 이름이 따라붙었다. 이명박이 고속 승진을 거듭해 1977년 서른다섯의 새파란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을 때에도 ‘박 대통령이 밀어주는 덕’이라는 입방아가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일자리 없는 민주화의 공허함
그러나 박 대통령이 당시 현대건설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이던 이명박의 근황을 물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기록되어 있는 것은 고려대 상대 4학년이던 1964년 ‘6·3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 주동자로 구속됐던 이명박이 이듬해 현대건설 입사시험을 본 뒤 박 대통령에게 취업 제한 조치를 풀어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현대 맨’들은 지금도 40년 전의 전설(傳說)을 사실로 믿고 있다. 오랜 세월 현대그룹에 몸담았던 한 인사의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은 분명하다. 하지만 박 대통령 덕에 ‘이명박 신화’가 이뤄졌다는 얘기는 억지다. 오너란 대개 귀가 얇고 의심이 많은 법이다. 그런 ‘왕(王)회장’ 밑에서 십수 년간 최고경영자(CEO)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씨의 남다른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정주영 회장은 “현대의 성장 자체가 무엇보다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고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박 대통령의 덕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정주영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 그렇다면 박정희가 있어 정주영이 있을 수 있었고, 정주영이 있어 이명박도 있을 수 있었다는 가설(假說)도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관료-재벌의 수직적 구조로 이뤄진 ‘박정희 식 국가 주도 성장모델’은 민주적 가치를 배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권력이 밀어주고 재벌이 뒷돈을 대는 정경유착(政經癒着) 구조 또한 시장의 확대와 민주화의 진전에 따라 자체 붕괴를 피할 수 없었다. 1992년 정주영의 대선 출마는 더 이상 권력과 재벌의 수직구조가 지속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다만 산업화와 민주화의 병행 발전이 과연 불가능했는가라는 의문을 지워 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박정희 성장모델’이 민주화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는 점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끼니 걱정하는 처지에 무슨 민주주의인가라는 소박한 질문은 어떤 논리보다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논리는 오늘에도 확대 변형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민주화는 이 정도면 됐다. 이제는 다시 경제라고. 민주주의를 축소하거나 유보하자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자리 없는 민주화는 공허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박정희 시대의 ‘CEO 신화’인 이명박과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차기 대통령후보로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대중이 요구하는 시대 흐름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이를 두고 평화개혁세력으로 자임하는 인물들은 ‘시대의 역행(逆行)’이라고 개탄한다. 대통령은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담합하는’ 보수언론의 탓이라고 분개한다. 그들만의 시대정신에 사로잡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만(傲慢)이자 어리석음이다. 사분오열(四分五裂)된 여권이 오로지 반(反)한나라당 전선에 매달리는 것도 시대의 요구를 잘못 읽었거나 외면하는 무책(無策)이 아닐 수 없다. 너도나도 대선후보로 나서겠다고 줄을 서는 것은 국민의 염증(厭症)과 냉소(冷笑)만 키울 뿐이다. 철 지난 이념을 떠들 때가 아니다. 국민은 먹고사는 문제를 얘기하라고 한다. 성장과 분배의 종합체인 일자리를 만들라고 한다.
무엇을 검증할 것인가
이명박 박근혜는 크든 작든 ‘박정희 시대의 신화’에 빚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 지난날의 신화는 없다. 국민은 미래의 비전과 유능한 리더십에 목말라 있다. 그것은 단순히 진보좌파의 실패에 따른 보수우파의 회귀(回歸)가 아니다. 진정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새로운 국가모델을 이뤄 내는 일이다. 검증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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