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여권 인사들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한나라당 후보가 안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전 시장을 경계하고 있다.
범여권은 이 전 시장의 강점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청계천을 복원한 ‘뭔가를 보여 주는 사람’이란 이미지를 우선 꼽는다. 이 전 시장의 ‘한반도 대운하’ 공약에 대해 “현실성 없는 공약(空約)”이라며 파상공세를 벌이고 있는 인사들마저 “솔직히 이명박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고 ‘고백’한다.
실업, 부동산 문제 등 경제 현안이 산적한 만큼 이 전 시장의 전문경영인, 자수성가 경력은 경쟁력이 있다는 게 범여권의 분석이다. 이 전 시장의 지지층이 범여권과 겹치는 중도와 진보 성향이란 점에서도 버겁다는 얘기도 많다. 특히 이 전 시장을 공격해 지지율이 떨어지면 손학규 전 경기지사와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지지율이 올라가 대선 판을 새로 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범여권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범여권은 대체로 “이명박은 너무 약점이 많아 낙마할 것”이란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말을 믿고 싶어하는 분위기다. BBK, 땅 차명 은닉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잇따라 터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초선 의원은 “이 전 시장은 샐러리맨 출신인데, 수천억 원의 재산을 은닉해 두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면서 “이런 의혹은 실체 여부를 떠나 나오면 나올수록 지지율을 갉아 먹는다”고 했다.
이 전 시장이 설화(舌禍)에 자주 휘말리는 점도 범여권이 ‘낙마’를 예상하는 주 원인이다. 서울시장 재직 시절의 ‘서울시 봉헌’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고 최근에도 장애인 낙태, 원로 여배우에 대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그래서 범여권 일각에선 ‘본선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이명박 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재선 의원은 “더는 상처 나지 않게 해서 본선까지 끌고 가면 승산이 있다”고 했다. 이 전 시장 지지자들의 결집을 돕기 위해서라도 공공연히 “이명박은 낙마할 것”이란 말을 해야 한다는 인사도 있다.
이 전 시장 캠프는 “이명박은 낙마할 것”이란 이 전 총리의 말에 “노골적인 이명박 죽이기 음모극의 극치”라며 불쾌해했다. 이 전 시장 캠프 박형준 대변인은 “본선에서 쉬운 상대(박근혜 전 대표)를 고르겠다는 노림수”라며 “본선까지 이대로 가면 도저히 샅바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에 미리 이명박 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열린우리당 원혜영 최고위원은 15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의혹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고 평상심을 잃지 않는 것 같다”면서 “대권후보로서 기본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며 치켜세웠다.
전날 박상천 민주당 대표와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박근혜가 더 쉽다”고 말한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하지만 범여권에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보다는 박 전 대표가 더 쉬운 상대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박 전 대표를 만만한 상대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범여권 인사들도 박 전 대표의 최대 강점으로 정체성과 이념을 꼽는다. 안보, 이념, 한미관계 등 ‘국가 정체성’ 문제가 핫이슈로 불거질 경우 박 전 대표가 후보가 되면 대선 승리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라고 분석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좌충우돌식 국정 운영이 박 전 대표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인사도 많다. 한 재선 의원은 “노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외칠 때마다 역설적으로 ‘독재면 어떠냐. 백성을 잘살게만 하면 됐지’란 여론을 키운다”고 우려했다. 20대 때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정 운영에 참여한 경력도 상대하기 버겁다는 분석도 있다.
범여권 한편에서는 ‘영남 포위론’을 바탕으로 박 전 대표를 평가하기도 한다. 박 전 대표가 영남 외에 확고부동한 지지 기반이 없다고 본다. 또 범여권엔 호남(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충청(이 전 총리)-경기(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대표하는 주자가 있기 때문에 범여권의 ‘서부벨트’가 복원되고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박 전 대표가 한나라당 후보가 될 경우 본선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범여권에는 박 전 대통령에게 ‘핍박’ 받은 인사가 많기 때문에 박 전 대표가 후보가 되면 민주-독재, 중도·진보-보수 등으로 극과 극 구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여성 대통령 시기상조론을 내세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 초선 의원은 “여성 지도자가 있는 나라는 스웨덴, 독일 등 상대적으로 현실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나라”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캠프는 ‘박근혜가 더 쉽다’는 범여권의 공언은 여권의 공격 목표가 박 전 대표임을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적을 친다는 뜻으로 속임수를 써서 상대를 공격함)’란 얘기다. 박 전 대표 캠프의 최경환 종합상황실장은 “이 전 시장이 흠이 있는 쉬운 상대이기 때문에 본선에서 버거운 박 전 대표 흠집 내기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X파일 있긴 있나▼
열린우리당 장영달 원내대표가 14일 한나라당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를 꺾을 수 있는 ‘중요 자료’를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을 놓고 진짜 확실한 검증을 거친 결정적 자료를 확보한 것인지, 한나라당 분열을 노린 단순한 ‘공갈포’에 불과한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장 원내대표는 15일에도 자료의 내용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그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결정될 때까지 지켜본 뒤 저라도 밝혀 드릴 수 있고 한나라당 후보와의 상호 토론을 통해 밝혀질 수 있다”고 말했다. 거듭되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알 만큼 알지만 지금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다. 반드시 도덕성 문제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다”며 아리송한 대답만 했다. 그는 “공개되면 (두 주자가) 상당히 힘들어질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열린우리당 주변에선 최근 당으로 속속 접수되고 있는 ‘빅2’ 관련 정보 가운데 ‘물건’을 건진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이 전 시장의 BBK 의혹과 관련한 추가 자료일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 전시장 주변 인사들의 부동산 투기설과 관련한 자료일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물론 장 원내대표가 소속 의원들을 격려하고 한나라당 중심의 대선구도를 흔들기 위해 공포탄을 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당 일각에선 한나라당의 두 주자 진영이 ‘제 살 깎아먹기’를 하고 있는데 공연히 끼어들어 전선(戰線)을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다.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가 지난해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 이 전 시장의 ‘황제테니스’ 논란이 일었을 때 “경악할 만한 사안이 있다”고 예고했다가 곤욕을 치렀던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근거 없는 공작정치의 전형”이라며 장 원내대표를 검찰에 고발키로 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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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김동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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