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전 대통령은 2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87년 6월 한 달 동안 긴박하게 흘렀던 권력 내부의 움직임과 6·29 선언의 의미, 6공화국에 대한 평가, 비자금 사건 등에 대해 털어놨다.
노 전 대통령은 우선 ‘6·29 선언’에 대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실천 시대를 열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한 뒤 “최근엔 ‘6월 항쟁’ 얘기만 떠들썩하고 ‘6·29 선언’이라는 말 자체를 들어보기조차 힘들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6·10에서 6·29까지 20일 동안 권력 내부에서 격변도 많았습니다. 군대 동원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는 민주주의의 회복은 불가능하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6·10항쟁은 민주화의 요구였고 투쟁이었습니다. 반면 6·29선언은 민주화의 제도화와 실천이었습니다. 6·10항쟁과 6·29선언이 지난 20년간 민주화에 있어서 두 개의 동테(바퀴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였는데 지금은 6·10항쟁이라는 한쪽 동테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6월 항쟁 당시 청와대는 군 출동 직전 단계인 ‘출동 준비’ 지시를 내렸는데,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막겠다고 결심했다”며 당시 권력 내부의 움직임을 상세히 들려줬다.
“청와대가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군 출동 직전 단계인 ‘출동 준비’ 지시를 내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6월 18일 자정에 전두환 대통령이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위수령 발동을 전제로 한, 군 출동 준비 태세를 갖추라고 지시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라인에 있는 이기백 국방장관, 안무혁 안기부장, 권복경 치안본부장 등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군의 출동만은 불가(不可)하다는 점을 건의해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모든 직위를 걸고서라도 군 출동은 막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지요. 다행히 6월 19일 오후 전 대통령이 국방장관에게 군 출동을 유보시켰습니다.”
그는 “파국을 면한 것은 민주화 세력에 대한 굴복이라기보다 민심을 읽고 최악의 강경책을 유보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은 6·29 선언의 주역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서는 “6·29의 핵심인 직선제와 김대중 씨 사면·복권은 어느 한 사람만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없다”며 “김용갑 청와대 민정수석이 내게 직선제를 건의했다느니, 김복동 씨가 나를 설득했다느니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은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직선제를 내게 제일 먼저 건의한 사람은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김종휘 국방대학원 교수(후에 외교안보수석)”라며 “1987년 초 우리 집에 새해 인사하러 와서 ‘직선제를 받아들이고 김대중 씨를 사면해야 한다’라고 했다”고 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어 자신의 통치기간인 ‘6공화국’에 대해서는 “6·29선언을 통해 민주화 시대를 열었고, 언론자유를 뿌리내리게 하고 한·중 수교 등 북방정책 수행, ‘남북기본합의서’ 채택한 것 등은 평가 받을 대목이라고 본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서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겼다는 점에 대해선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는 생각엔 변함없다. 비자금 문제에 대해 머지않아 보다 소상하게 역사와 국민 앞에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다.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밖에 나다니지 않다 보니 건강 악화설이 나오는 모양”이라며 “‘오늘 내일 한다’는 소문까지 나돈다는데 아직 갈 때는 아니다. 전립선이 좋지 않아 몇 년 전 수술을 받았고, 혈압 불안정 증세까지 생겨 걷는 것이 불편하다”고 했다.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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