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김승규 당시 국가정보원장은 내부 조사를 거친 뒤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도청이 계속됐다”며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2002년 대선 때 언론과 야당에서 정치인에 대한 국정원의 도청 의혹을 제기할 때마다 “휴대전화는 도청할 수 없다”고 부인했던 국정원은 국정원 내 도청팀인 ‘미림팀’과 관련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뒤늦게 사실을 밝혀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최근 특정 후보에 대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는 의혹에 대해 대응하는 국정원의 태도가 정치사찰→은폐의혹→의혹 부인하다 뒤늦게 인정하는 도청 의혹 당시와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 광범위한 자료 접근으로 정치사찰
국정원은 불법임을 알면서도 손쉽게 정치사찰을 할 수 있는 도청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2005년 8월 김 원장이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날, 김만복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은 “안기부나 국정원의 도청팀 직원들은 정확한 정보는 도·감청 작업에서 나오는 것으로 알고 (이런 작업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 도청을 담당했던 국정원 과학보안국장을 지낸 A 씨는 2005년 당시 기자와 만나 “손쉽게 감청 영장의 집행기간을 연기할 수 있기 때문에 감청할 필요가 없어진 사람도 현재 감청 대상에 계속 포함돼 감청을 당하고 있다”며 사실상 감청을 시인하기도 했다.
국정원이 국정원법에서 정해진 직무 범위를 넘겼다는 논란이 있는데도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처남에 대해 부동산 기록을 열람하는 등 정치인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는 것도 국정원의 자료 접근이 지나치게 자유롭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정원이 14개 국가기관, 17개 종류의 비공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본보 17일자 1·4면 참조) 다른 정치인에 대해서도 조사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낳고 있다.
○ 은폐 의혹?
2005년 A 씨는 국정원이 “2001년 12월 개정된 통신비밀보호법이 이듬해 3월 시행됨에 따라 신규 장비는 물론이고 기존 장비까지 모두 국회 정보위원회에 신고해야 했다”며 “기존 장비를 신고할 경우 도청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감청 장비를 폐기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감청 실태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 서둘러 사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증언이었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는 최근 “최근 국정원이 2005년 당시 야당 대선 주자를 스크린했던 TF를 감추기 위해 조직적인 은폐 작업에 돌입했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며 “국정원이 이 팀들의 활동을 은폐하기 위해 사업계획서를 폐기하고 컴퓨터의 각종 근거 자료도 삭제 중인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
○ 부인하다 밝혀지면 시인
국정원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의원들이 국정원이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도청 자료를 공개하자 “증권가에서 만들어진 정보지”라고 부인했다.
국정원은 또 본보가 2002년 ‘국정원이 휴대전화 도청기기를 통해 정·관·재·언론계 주요 인사까지 도청을 시도했다’는 내용을 보도했을 때는 “휴대전화 도청 장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 언론을 통해 ‘미림팀’ 사건이 터졌고 검찰 조사에서 이 때의 의혹은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국정원도 “2002년까지 휴대전화 감청을 실시했다”고 인정했다.
8일 한나라당 이재오 최고위원이 2005년 국정원의 ‘이명박 X파일’ 작성 의혹을 처음 제기하자, 국정원은 즉각 “사실이 아닐 경우 엄중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강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언론을 통해 국정원 5급 직원이 국정원 전산망에 접속해 이 전 시장의 처남 김재정 씨의 부동산 관련 기록을 조회한 사실이 국정원 내부 조사 결과 확인됐다고 보도가 나가자 뒤늦게 ‘부패척결 TF’에서 이 전 시장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조사했다고 시인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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