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박 후보 모두발언 및 일문일답.
◇모두 발언
정직하고 바르게 살려고 했다. 이는 돌아가신 부모님의 가르침이자 부모님에게 누가 돼선 안된다는 결심이었다. 대통령의 자리가 너무나 막중해 국민은 후보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대선에서 승리할 후보와 흠결없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국민이 현명하게 판단해 달라.
◇일문일답
-전두환 합수본부장으로부터 9억 원을 받은 뒤 김재규 수사 격려금으로 3억 원을 돌려줬다는 얘기가 있다.
"9억 원이 아니라 6억 원을 받았다. 3억 원을 격려금으로 돌려준 게 없다. 6억 원은 유자녀 생계비 명목으로 받았다. 전두환 측 심부름을 왔다는 분이 만나자고 해서 청와대 비서실로 갔더니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쓰시다 남은 돈이다. 법적 문제가 없다. 생계비로 쓰라"고 전해줘서 감사하게 받고 나왔다."
-일부 언론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82년 성북동 주택을 줬다고 한다. 성북동 주택을 무상취득했는가?
"예. 신기수 회장과 아버님의 인연으로 성북동에 집을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 유품을 보관할 장소가 있으니 이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서 받아들였다. 법적으로 세금 관계나 모든 것의 처리를 알아서 한다고 해서 믿고 맡겼다."
-박 후보가 추천해서 신 회장이 영남재단 이사장이 되지 않았나?
"제가 추천한 게 아니다. 학교발전에 도움되는 분 중 신 회장도 거론돼 이사회에서 추천된 것으로 안다."
-어떤 월간지는 신 회장과 박 후보의 약혼설도 보도했다. 어떤 관계인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 국민이 전부 생중계로 보시는데 그렇게 약혼설까지 질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박 후보는 영남대의 각종 신축공사를 신 회장에게 주고 성북동 자택을 무상으로 받은 것 아닌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경남기업뿐만 아니라 4군데 이상의 건설업체가 영남대 건설을 맡았고 경쟁입찰로 기억한다. 재단이 일일이 간섭하는 게 아니라 교비에서 하는 것이라서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최태민 목사를 어떻게 만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로 기억한다. 그때 제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어머니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바쁘게 보낼 때인데 위로·격려편지와 전화를 주신 분 중 마음에 와닿아 만난 분 중 하나다."
-최 목사는 이름이 7개, 결혼도 6번 했다고 한다. 최 목사의 경력을 당시에 알았는가?
"목사로 알았고, 당시에 그런 내용은 몰랐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일생까지 검토해서 만나지 않는다.
-최 목사는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비리를 저지르고 청와대를 무상출입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했었다.
"경호실 비서실이 있고 출입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청와대 무상출입이 가능하지 않다. 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각종 비리가 있는 사람(최 목사)이 있다고 해 아버지가 직접 조사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당시 제가 퍼스트레이디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 어머니가 그랬듯이 아버지에게 세상의 돌아가는 얘기들을 말씀드렸다. 그런 과정에서 저의 활동범위가 넓어지는 것을 견제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정보부 조사에 의하면 최 목사는 공사 수주, 장군 승진, 국회의원 공천 명목으로 돈을 받는 등 비리건수가 40여 건이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저와 중정부장, 최 목사, 관계되는 사람들을 불러 직접 조사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어떻게 횡령하고 사기를 쳤는지 답하라고 했는데 확실한 답이 없었고, (비리) 내용이 막연했다. 실체가 없는 얘기로 끝나서 아버지가 대검에서 조사해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친척도 엄격하게 관리했다.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용서가 없었을 것이다. 근데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대검에서 조사해 엄청난 비리가 나왔다면 왜 그것을 덮겠냐. 아버지 시대는 그렇다 치더라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무조사 등이 있었고 저와 아버지가 매도당하던 시절인데 저와 주변을 왜 봐주겠는가. 하지만 만약 지금이라도 실체가 있다면 마땅히 비난을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최태민 목사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은 일이 있는가?
"저에게 재정적 지원할 형편이 아니다. 제가 받거나 요청한 적도 없다."
-최 목사 관련 의혹을 제기하면 박 후보는 `천벌을 받을 짓'이라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최 목사와 저를 연결해 주변 사람이 나쁘니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식으로 공격해왔다. 나중에는 '애가 있다'는 등 차마 입에도 담지 못할 얘기까지 나왔다. 아무리 네거티브를 해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정말 천벌받을 일 아닌가. 애가 있다면 애를 데리고 와도 좋다. DNA 검사도 해주겠다. 멀쩡한 애를 데리고 와서 맞느니 아니니 하면 그 아이나 어머니는 어떻게 되나. 천륜을 끊는 일인데…. 옛말에 천벌 받으려면 무슨 짓을 못해라는 말이 있는데 남을 음해하기 위해 이런 얘기까지 지어내는가. 정말 한탄스런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 공보비서관을 지낸 선우연 씨는 2005년 11월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77년 9월12일 밤 박 대통령이 물의를 일으킨 최태민을 거세하고, 최 목사와 관련된 구국봉사단도 해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자신의 비망록을 공개했다.
"대검, 중정이 있는데 아버지가 왜 한 비서관에게 (거세) 지시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또 구국봉사단 활동에 대해선 아버지가 격려를 해주시곤 했다. 비망록 자체가 이상하다. 청와대 비서관이라고 전부 사실에 입각한 증언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제 수필에도 썼지만 세상 인심이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배신할 수 있느냐에 대해 많은 비애를 느꼈다."
-82년 10월부터 90년 11월까지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했는데 보수와 판공비를 받은 적이 없는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육영재단이 붕 뜬 상태였다. 육영재단 사람들이 이사장직을 맡아 유지를 이어야 한다고 건의해 책임을 느끼고 이사장을 맡았다. 보수와 판공비를 받지 않았다."
-박 후보가 이후 육영재단 이사장을 퇴임한 이유와 관련해 최 목사와 딸 최순실이 박 후보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직원들이 반발한 게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어머니 기념사업을 육영재단에서 같이 했고, 당시 최 목사가 기념사업일을 도왔다. 오해가 있어서 '최태민 물러가라'는 식으로 데모가 있었지만 최 목사나 딸이 결코 육영재단 일에 관여한 적이 없다."
-최 목사 문제로 이사장을 그만두고 동생 근영 씨가 이사장에 취임하지 않았나?
"소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생에게 물려준 것은 그 때문이 아니다."
-최 목사가 육영재단 고문의 직함을 갖고 이사장인 박 후보에게 결재를 받기 전에 먼저 결재를 받을 정도로 재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제가 무능하다거나 일을 잘 못한다고 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최 목사가 고문직을 직접 한 것이 없고, 최 목사가 연로해 고문으로 예우해서 부른 것뿐이다."
-최 목사의 자녀들이 강남에 수백 억대 부동산을 가지고 있다는데 육영재단과 관련해 취득한 재산이 아닌가?
"천부당 만부당하다. 말이 안된다. 육영재단은 개인사업체가 아니라 공익재단이다. 매년 감사를 받고 감독청의 감사를 받는다. 단 한푼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88년 박정희 서거 9주기를 맞아 박 후보가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했다. 모금 및 사용내역은…?
"누가 공개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공개할 계기가 없었을 뿐이고 관리는 공적으로 해왔다. 7억2379만 원 모금해 기념관 건립을 위해 그 중 5억원을 기념사업회에 전달했고 유품을 데이터베이스화하는데 1억2000만 원을 썼다. 나머지는 그대로 육영수 기념사업회에 줬다."
-2002년 2월 한나라당 탈당 당시 명분은 국민참여 경선이 수용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박 후보는 최근 경선룰을 만들 때 많은 국민의 참여를 반대했다.
"국민참여 경선 때문에 당을 떠난 것은 아니다. 저는 한나라당의 개혁을 주장했었고, 개혁의 핵심은 제왕적 총재가 없는 집단 지도체제, 인사·재정의 투명화 등이었다. 지금 와서 국민참여 비율을 늘리는데 왜 반대하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중요한 것은 공당에서 총의를 모아 법칙을 정하면 승복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합법적 절차로 당원의 총의가 모아진 것이니 유불리를 따지지 않아야 한다고 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긴급조치 해제를 선친(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건의해본 적은 없었나?
"시중의 여론을 아버지께 전해드렸다. 아버지가 총탄에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유신체제가 끝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당시 아버님은 유신헌법 개정안 연구를 지시했고 물러날 준비를 하셨다. 식사시간에도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됐으면 좋겠느냐'고 의견을 물어보셨다."
-90년 육영재단에서 발간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박 후보는 5·16과 4·19 정신,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 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역사의식에 의문이 간다.
"5·16은 구국혁명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나라가 혼란스러웠고 남북 대치 상황에서 잘못하면 북한에 흡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혁명공약에도 '기아선상에 헤매는 국민을 구제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유신 체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만 유신시대에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희생하셨던 분들과 고통받으신 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생각을 갖고 있다."
-박 후보가 영남대 재단 이사가 된 지 1년 후에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관 1조에 '교주(校主) 박정희'라는 규정이 삽입된 경위는…?
"당시 재단이사 한분이 정관에 그런 내용을 넣자고 해서 이사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안다. 저도 이사회에 참석했고 찬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남대 재단이 전액 출자한 영남투자금융회사는 육영재단이 발간하는 어린이 잡지 `보물섬' 등에 장기간 광고하고 광고비로 2700여만원, 기부금도 1억3000여 만 원 지급했는데 알고 있었나?
"기부금 출연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육영재단이 공익재단이기 때문에 영남투자금융 뿐 아니라 다른데서도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 제가 영남투자금융에 강요한 적은 없다. 경영진에서 판단해서 한 것으로 안다."
-정수장학회 강제 헌납 의혹에 대해 박 후보가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당시 이런 문제점을 알고 있었나?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강제 헌납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자료를 정수장학회에서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수장학회 운영에 관련된 원로들의 의견을 물어 장학재단 국가 헌납 등을 검토해서 문제를 털 생각은 없나?
"제가 이사장 그만둔 지 오래됐고 새 이사장을 뽑아 저와는 관계 없이 운영되고 있어서 제가 공익재단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정수장학회 이사회가 결정할 사항이다."
-박 후보가 정수장학회 섭외비 수억 원을 탈세했다는 보도가 있다.
"원래 섭외비에 대해 납세의무가 없다가 그 후 법이 바뀌었는데 감독관청에서 아무 지적이 없어서 몰랐다. 실무진이 처리를 못해서 누락 사실을 알게 됐다. 정수장학회 자문 세무사에게 문의해서 퇴직금 중간정산을 통해 납부했다."
-국회의원 당선 이후 정수장학회에 출근하지 않고 섭외비를 횡령했다는 의혹이 있다.
"일주일에 두세 번 가서 결재할 것 하고 이사회도 주재했다. 횡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국회의원과 이사장을 겸임하면서 의원세비에서만 건보료를 냈는데…?
"법이 바뀌어서 겸직하면 겸직한 대로 다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실무진이 몰랐다. 나중에 지적을 받고 다 납부했다."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에게 국민경선 집단지도체제를 요구하다 탈당했는데…?
"제왕적 총재 시스템을 바꿔 당권과 대권을 분리하고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자고 했는데 상향식 공천이나 재정 투명화 등 핵심적 내용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당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2004년 2월 대선자금 조사에서 복당 과정에서 2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제가 조사받은 적은 없다. 당시 복당해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그래서 사무총장에게 확인했는데 2002년 11월 26일과 12월 7일에 각각 1억 원씩 2억 원을 선거활동비 운영자금으로 받았다. 합당조건으로는 단 한푼도 받은 적이 없다."
-79년부터 97년 정계 입문할 때까지 은둔생활을 한 이유는 무엇이고 어떤 일을 했나?
"당시 의원도 아니었고 육영재단을 운영하거나 수필을 쓰면서 지내느라 언론에 보도가 안됐다. 보도가 안됐다고 은둔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여러 재단을 운영했고 운동도 많이 했고 수필집도 내서 문인협회에 등록했고 여행도 많이 했다."
-사실 79년에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받은) 6억 원은 적지 않은 돈 아닌가?
"그 돈을 기념사업회 할 때도 많이 썼다."
-2002년 방북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국가보안법 얘기를 했다는 설과 밀약설도 있다.
"북한에 가서 국가보안법 얘기한 적 없다. 밀약도 전혀 없다. (김 위원장에게) 6·15 때 한 답방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디지털뉴스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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