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시장은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50대 국회의원, 60대 서울시장을 지냈다. 36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된 뒤 26년 동안 최고경영자(CEO)를 지내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린다. 그가 ‘새로운 신화 창조’를 꿈꾸고 있다. 17대 대통령선거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서 ‘대한민국의 신화’ 창조에 나선 것.
이 전 시장의 저서와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전 시장 삶의 궤적을 짚어 본다. 이 전 시장의 저서를 소제목으로 활용했다.》
○ ‘어머니’(2007년)
이 전 시장은 13번의 경선 합동유세를 거치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어머니’와 ‘가난’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이 전 시장은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 씨와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4남 3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출생지가 일본이며 형제들과 달리 호적상 돌림자를 쓰지 않고 이름 ‘명박(明博)’이 ‘아키히로’라는 일본 이름과 한자가 같아 “어머니가 일본인이며 형들과는 배다른 형제”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는 최근 입속에서 세포를 떼어내 유전자(DNA) 검사를 실시해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과 배가 다르다는 소문이 허위임을 증명했다. 다른 네거티브에는 직접적 대응을 삼가던 이 전 시장도 “어머니까지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고 강하게 불쾌감을 나타냈다.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게 들러붙은 가난은 내가 스무 살이 넘어서도 떨어질 줄 몰랐다”고 회상할 정도로 그의 어린 시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이 전 시장 가족은 광복 직후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에 배가 뒤집어지면서 종자돈을 모두 날렸다. 귀국한 뒤에 아버지는 목장에서 일하는 목부로, 어머니는 과일행상으로 애썼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다. 6·25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누나(귀애 씨)와 막냇동생(상필 씨)을 잃기도 했다.
그는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와 살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생활전선에 나섰고 중고교 시절에는 김밥, 풀빵, 엿, 뻥튀기 장사를 하며 장학금으로 포항중,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했다.
고교 졸업 후 빈손으로 상경한 뒤 청계천 책방에서 헌책을 얻어 독학으로 1961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태원 재래시장 환경미화원으로 학비를 벌며 학교를 다니다 1964년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6·3한일회담반대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6개월간 복역했다.
수감 시절 그의 어머니가 흰색 저고리를 입고 서대문형무소에 면회를 와 “소신대로 행동해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 말은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어머니는 이 전 시장이 출감한 뒤 한 달 만에 세상을 떴다. 이 전 시장은 아직도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일로 어머니 생전에 새 옷 한 벌 못 해드린 것을 꼽는다. 한 캠프 관계자는 “이 전 시장이 어린 시절 ‘가난’을 제공했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심어 준 어머니에게 애틋한 정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온몸으로 부딪쳐라’(2007년)
그는 해외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를 지원했으나 회사로부터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힘들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는 청와대에 편지로 선처를 호소했으나 거절당하자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이라고 말하며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만나 설득해 입사에 성공했다.
“건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당시 정주영 회장의 입사 면접 질문에서 “건설은 창조”라고 답해 입사한 그는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CEO에 올랐다.
골재 생산업체가 청와대의 지시를 먼저 이행해야 한다며 이 전 시장과 약속한 시한을 지키지 않자 불도저로 업체의 업무를 막아 청와대로부터 양보를 받아 낸 것, 신군부가 중공업 중복 투자를 쇄신하겠다며 현대에 자동차를 포기하고 발전설비를 택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그가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아 무산시킨 것 등은 CEO 시절 유명한 이야기다.
○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2002년)
1992년 1월 3일, 이 전 시장은 인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27년 동안 모셨던 ‘왕회장’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창당을 결심하고 합류를 제안했지만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반감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고 회사를 나왔다.
이 전 시장은 당시 여당인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입문 이유에 대해 “우리 기업은 이미 성장해서 세계 일류기업과 어깨를 겨루고 있는데 정치는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권력만을 잡기 위해 안달하고 있다. 이 커다란 간극을 기업에서의 체험과 안목으로 메워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의 선택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이 전 시장은 정 회장이 창당한 국민당과 맞서지 않기 위해 전국구를 택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인생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정치에서 나는 비주류”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는 결국 1995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패배했고, 15대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이종찬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지만 1998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사퇴했다.
○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2005년)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까지 오른 건 서울시장 시절 ‘청계천 복원 사업’, ‘버스전용차로 등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등의 사업에서 성공한 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이 전 시장은 자서전에서 청계천 복원을 위해 2002년 서울시장에 또다시 도전하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청계천 복원이 여러 구에 걸쳐 있어 국회의원이나 구청장 신분으로는 복원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서울시장 도전 의사를 굳혔다. 이 전 시장은 선거 때 당시 민주당 김민석 후보가 “청계천을 복원하면 교통대란, 쓰레기대란, 상인대란이 일어난다” 등 맹공을 퍼부었지만 이를 딛고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청계천 복원 계획을 발표하자 청계천 노점상들은 치열하게 반대 시위를 펼쳤다. 그는 상인전담팀을 만들어 2002년 7월부터 2003년 6월까지 4200번도 넘게 노점상들과 만나 결국 협조를 얻어냈다. 2006년 6월 서울시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 동력을 찾아 국내외 첨단산업 탐사에 나섰으며 탐사 결과를 보고서 형식으로 정리해 ‘흔들리지 않는 약속’이라는 책을 펴냈다. 이 전 시장이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서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할 수 있을지, ‘경제 살리기’와 ‘따뜻한 사회 만들기’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것인지는 대선일인 12월 19일 판가름 나게 된다.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이명박, 그는 누구인가 생년월일 1941년 12월 19일(양력) 출생지, 본적, 본관 일본 오사카 시, 경북 포항시, 경북 경주시 키, 몸무게, 시력 173cm, 70kg, 좌 1.0 우 1.0 혈액형 B형 병역 면제(사유-기관지확장증) 가족관계 부인, 1남 3녀, 형제는 4남 3녀 종교 기독교 재산 신고액 331억 원 별명 컴도저(컴퓨터가 달린 불도저) 좌우명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존경하는 인물 안창호, 간디, 잭 웰치 감명 깊게 본 영화 오아시스, 집으로, 캐스트 어웨이, 벤허 감명 깊게 읽은 책 슈바이처 전기, 무소유(법정 스님) 좋아하는 음식 순두부, 김치찌개, 비빔밥, 스파게티 존경하는 정치인 간디, 안창호 어린 시절 꿈 선생님, 소방관 본인이 생각하는 행복 화목한 가정, 따뜻한 사회 본인이 생각하는 장점 긍정적 사고 학력 포항중, 동지상고, 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저서 ‘신화는 없다’ ‘절망이라지만 나는 희망이 보인다’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온몸으로 부딪쳐라’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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