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주최한 공식 환영 만찬에서 건배사를 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을 기원했다. 김 위원장이 만찬장에 ‘깜짝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남측 수행원들과 북측 관계자들이 섞여 앉은 가운데 오후 7시 시작된 만찬은 오후 8시 35분경부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먼저 김만복 국정원장, 김장수 국방부 장관, 김정길 대한체육회장, 배기선 대통합민주신당 의원 등이 앉은 테이블에서 북측 관계자들과 함께 “위하여”를 외치는 건배 소리가 들렸다. 뒤를 이어 여러 테이블에서도 “위하여”를 외쳤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노 대통령이 갑자기 술잔을 들고 사회를 보는 자리로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긴장감마저 조성됐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노 대통령은 “여러분들이 각 테이블에서 건배하는 것을 보니 신명이 좀 나는 것 같다”며 “나머지 테이블은 따라 하자니 그렇고 안 하자니 기분이 안 풀리는 것 같으니 다 같이 기분을 풉시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남북한 간에 평화가 잘되고 경제도 잘되려면 빠뜨릴 수 없는 일이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하시고, 또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건강해야 한다”며 “좀 전에 (제가) 건배사를 할 때 두 분의 건강에 대해 건배하는 것을 잊었다”고 했다. 만찬장은 일순 고요해졌다.
노 대통령은 “신명난 김에 김 위원장과 김 상임위원장, 두 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합시다”라며 “위하여”를 선창했다. 만찬 참석자들도 뒤따라 일어나 “위하여”를 외친 뒤 박수를 쳤다.
만찬 메뉴는 게사니(거위)구이, 잉어뱃살찜, 송이버섯, 쌀밥 등이었으며 만찬주로 고려개성인삼주와 들쭉술, 용성맥주, 동양술(고량주의 일종)이 나왔다.
앞서 노 대통령은 오후 4시부터 김 상임위원장과 공식 면담을 했다. 면담은 당초 예정했던 1시간 넘게 이뤄졌다. 회담을 마친 노 대통령은 김 상임위원장과 함께 만수대의사당 내부를 둘러본 뒤 방명록에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는 글을 남겼다. ○…청와대를 떠나 평양까지 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4시간도 되지 않았다.
이날 오전 7시 55분경 청와대를 출발한 노 대통령 일행은 남북출입사무소(CIQ)를 통과해 왕복 4차로 160km에 이르는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달렸다. 여름 수해로 일부 파손됐던 고속도로는 말끔히 보수돼 있었다.
개성에서 70km 정도 떨어진 황해북도 서흥군 수곡휴게소에서 20여 분간 휴식을 취한 대통령 일행은 오전 11시 40분경 평양 시내 인민문화궁전 앞에 도착해 김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노 대통령과 김 상임위원장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무개차에 나란히 올라 인사를 나눈 뒤 공식 환영식이 열린 4·25문화회관까지 평양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20분 남짓 카퍼레이드를 했다.
○…노 대통령 일행은 청와대 출발 1시간여 만인 오전 9시경 비무장지대 MDL 30m 전방 지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MDL 10m 앞까지 걸어간 노 대통령은 남쪽을 향해 돌아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민족을 갈라놓고 있는 장벽”이라며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노 대통령은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며 “제가 다녀오면 더 많은 사람이 다녀오게 될 것이며 금단의 선도 지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MDL 북쪽에는 평양에서 온 최승철 통일전선부 부부장과 이상관 황해북도 인민위원장, 김일근 개성시 인민위원장 등이 노 대통령 내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북에 앞서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7시 35분부터 청와대에서 국무위원들과 10여 분 동안 간담회를 한 뒤 ‘대국민 인사’를 했다.
노 대통령은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몸을 사리거나 금기를 두지도 않을 것”이라고 방북 각오를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전 태극기와 봉황 문양의 깃발이 달린 전용차량 벤츠 S600을 타고 청와대를 출발했다.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의 상대역은 예상대로 북한을 대표하는 여성계 인사들이었다.
권 여사는 이날 오후 3시 숙소인 백화원초대소 영빈관에서 박순희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장과 유미영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등 북측 여성 지도자 11명을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 박 위원장과 유 위원장은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대표적인 북측 고위 여성 인사다.
평양=공동취재단
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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