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는 7일 출마선언 기자회견문에서 “지금 이 순간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처절하고 비장한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평생 몸담았던 주류의 큰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선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이 전 총재는 대학, 법관 시절, 정치 입문 후에도 엘리트 코스를 밟아 왔다. 그동안 명분과 원칙을 앞세운 ‘대쪽’ 이미지였던 그가 앞으로 ‘변절자’ ‘거짓말쟁이’ ‘정권교체의 방해자’라는 주변의 비판을 어떻게 견디며 대선 3수의 한(恨)을 풀지 주목된다. 72세의 고령에 버거운 도전을 선택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유년시절=이 전 총재는 1935년 아버지 이홍규(작고) 씨와 어머니 김사순(작고) 씨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검사였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6번의 이사를 되풀이했다. 학교는 광주 서석초등학교, 청주중학교를 거쳐 경기중 2학년에 편입해 경기고를 졸업했다.
그는 청주중 1학년 때 집을 가출해 몇십 리를 걸어 조치원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기다리다 집에 들어왔다. 학기말 수학시험에서 60점 만점에 20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다. 자서전인 ‘아름다운 원칙’에서 그는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전 총재는 6·25전쟁 직전 경기중 4학년(지금의 고1) 때 서울지검 검사였던 부친이 ‘남로당원을 무혐의로 풀어 줬다’는 이유로 수갑이 채워진 채 연행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뒤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 박사의 도움으로 곧 풀려났다.
1962년 인천지법 초임판사 시절, 선배의 소개로 당시 서울고법원장의 딸인 부인 한인옥 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는 첫사랑이 한 씨라고 말한다.
이 전 총재에게 ‘대쪽’이라는 호칭이 붙은 것은 1981년 4월 46세의 젊은 나이에 대법원 판사로 발탁된 이후 소수의견을 낸 경력 때문이다. 그는 5년간 전원합의체 사건 46건 중 계엄포고령,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내용 등 10건에서 소수의견을 냈다. 이로 인해 그는 대법관 재임용에 탈락했다.
이 전 총재는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맡았고 김영삼 정권 초기에 감사원장과 국무총리 등의 공직을 거쳤다. 그는 1989년 10월 선거사범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항의하며 선관위원장직을 사퇴했고, 총리 시절 개혁 정책을 주장하며 김영삼 대통령과 마찰을 빚다가 1994년 4월 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 운영 문제 때문에 반발하며 총리직을 사퇴했다.
김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해 곧바로 중앙 선거대책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이후 ‘비민주적인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며 정당 개혁을 요구해 김 전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다. 그는 1997년 7월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그는 한때 50% 가까운 높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아들 정연 씨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지지율이 곤두박질쳤고,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탈당한 이인제 후보의 악재까지 겹쳐 39만 표의 근소한 차로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했다.
이 후보는 대선에서 석패한 뒤 명예총재로 물러앉았다가 1998년 8월 전당대회를 통해 총재직에 오르며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세풍, 총풍, 북풍 등 악재에다가 1998년 동생 이회성 씨가 구속되고 33명의 의원이 여당에 넘어가는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2000년 총선에서 133석의 원내 1당을 만들면서 이회창 대세론을 형성했다.
그러나 김대업 병풍 공세 속에 노무현 당시 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승리 21’ 후보의 단일화 벽을 넘지 못하고 57만여 표 차로 패배했다.
이 전 총재는 대선에서 진 다음 날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당사에서 눈물을 흘리며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이후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서 연구활동을 하는 등 조용히 칩거하다가 2005년 말부터 대중 행사와 외부 특강을 하며 국가 정체성을 강조해 왔다.
▽가족=이 전 총재의 친가, 외가, 처가는 모두 ‘명문가’다. 큰아버지 태규 씨는 노벨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화학자, 형 회정 씨는 의사, 동생 회성 씨는 에너지경제연구원장을 지낸 계명대 교수, 회경 씨는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다. 친가에서만 2대에 걸쳐 박사 7명을 배출했다.
외할아버지 김재희 씨는 전남 담양의 만석꾼이고, 외삼촌 홍용, 문용, 성용 씨는 모두 국회의원을 지냈다.
장인 한성수 씨는 대법관을 지냈고 큰처남 대현 씨는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둘째 처남 세현 씨는 치과의사, 셋째 처남 우현 씨는 기업체 전무 출신이다.
자녀는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인 정연 씨와 무역업을 하는 수연 씨, 연희(주부) 씨 등 2남 1녀다. 사위 최명석 씨는 로펌 김&장에 다니는 검사 출신 변호사다.
■ 출마회견 장소 단암빌딩은
이 전 총재의 사무실이 있는 이 빌딩은 장남 정연 씨의 장인인 이봉서 전 상공부 장관의 소유다. 이 전 총재의 선거대책위원회도 이 빌딩 2층에 꾸려질 예정이다.
이 전 총재는 2004년 9월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교환교수 연구원을 마치고 귀국해 이 빌딩 21층에 20여 평 규모의 사무실을 냈다. 그는 스탠퍼드대 일을 완전히 정리한 11월부터 이 사무실에 출근해 손님들을 만나왔다. 이흥주 특보와 여직원 등이 사무실을 지켜 왔다.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가 정계 은퇴 뒤 돈이 넉넉지 않은 터라 사돈의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면서 “이 전 총재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 등에 따른 답답한 마음을 이곳으로 출근해 달랬다”고 말했다.
이 특보는 “이 전 총재가 정계 은퇴 후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단암빌딩에서 출마선언을 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 때는 사위 최명석 변호사의 부친인 최기선 씨 소유인 서울 종로구 가회동 빌라를 빌려 쓰다 ‘호화빌라’ 논란에 휘말리기도 했다. 이 전 총재가 당시 대선자금용 특별 당비 5억 원을 내느라 원래 살던 집을 팔면서 거처가 마땅치 않자 사돈인 최 씨가 쓰게 한 것. 논란이 확대되자 이 전 총재는 그해 4월 종로구 옥인동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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