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상으로는 수용, 속마음은 거부.’
노무현 대통령은 27일 ‘삼성 비자금 특검법’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특검제와 정치권을 성토했다. 특히 이른바 ‘당선 축하금’이 수사 대상에 포함된 데 대해 “국회가 정략적으로 대통령을 흔든다”고 맹비난했다.
▽어쩔 수 없이 받는다=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좀 있다고 생각해 이 자리에 섰다”고 말문을 연 뒤 “재의(再議) 요구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며 특검법 수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23일 국회 본회의에서 특검법이 통과될 때 재적 의원 189명의 80%가 넘는 155명의 찬성으로 통과된 만큼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국회가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으로 통과시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것.
노 대통령은 당초 특검법이 공직부패수사처법과 연계되지 않으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가 방향을 튼 것에 대해 “원칙을 깬 게 아니라 부득이한 판단”이라고 했다. △검찰의 위신과 신뢰는 가급적 유지되어야 하고 △특검 논의가 지나치게 포괄적이어서 다듬어지길 바랐고 △공수처 문제에 대한 국회의 부당성을 국민에게 알리려 했던 의도 등 당초 거부권 행사를 시사했던 이유도 설명했다.
▽특검은 국회의원에게만 편리한 제도=노 대통령은 “그동안 특검이 다섯 번 있었는데 세 번은 완전히 헛일만 했다. 엄청난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며 많은 사람들 집을 뒤지고, 사람 부르고 했지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며 특검제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특검법을 처리한 국회의원들을 “횡포” “지위 남용” “공권력의 무절제한 마구잡이 행사” 등의 표현으로 비난하고 “다리가 있으면 다리를 건너면 되지, 왜 굳이 나룻배를 띄워야 하느냐”며 공수처법 처리를 촉구했다.
노 대통령은 “특검이 참 좋은 제도인 줄 알고 있는 국민에게, 이것은 국회의원들에게만 편리한 제도라는 점을 분명히 이해해 주십사 부탁 드린다”며 각종 여론조사에서 특검 필요성에 찬성한 국민에 대해서도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홍준표, 안상수 의원 고소할 수도 없어=노 대통령은 당선 축하금 의혹에 대해서는 연방 큰 동작을 취하며 흥분했다. “여러분, 의혹 갖고 있나? 의혹의 근거가 뭐냐? 의혹을 가질 만한, 의혹의 근거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홍준표 씨, 안상수 씨가 말한 것밖에 없는데 말에 전혀 구체성이 없어 고소도 못 하겠더라”고 두 한나라당 의원을 거명하며 비꼬았다.
▽참모들은 춥고 배고픈 데 살던 사람들=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이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았을 것으로 믿는다며 신뢰를 나타냈다.
노 대통령은 배석한 참모들을 쳐다보고 웃으면서 “청와대 사람들은 춥고 배고픈 데 살던 사람들이어서 인맥이 시원치 않다. 학벌들은 괜찮겠지만…”이라며 “양지쪽에 있던 사람들이 와서 삼성과 인맥 팍팍 뚫어놓고 거래해 가면서 따뜻하고 편안하게 비서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 정윤재 전 대통령의전비서관 사건 때 성급히 옹호했다가 낭패를 본 일을 의식한 듯 “지난번에 큰소리하다 좀 구겨졌지만 또 구겨지더라도 믿음을 갖고 있다”고 참모들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노 대통령은 “이용철 전 민정비서관을 두고 청와대 일반에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깊이 있게 보지 않은 결과라고 본다”고도 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X파일’ 부활할까▼
청와대가 삼성 비자금 및 로비 의혹 사건 등에 대한 특검을 받아들이기로 함에 따라 2005년 이른바 ‘X파일’로 알려졌던 국가안전기획부 및 국가정보원의 불법 감청 자료 내용이 특검 수사 대상이 될는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당시 1997년 9월 9일 X파일 내용엔 홍석현(현 중앙일보 회장)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 이학수 당시 삼성구조조정본부장에게 “(이회창 후보의 동생인) 이회성이가 왔는데, 내가 돈을 줬는데, 차를 우리 집이 아니라 길에 세웠어. 이번에 준 30억 원도 다 썼대요”라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검찰은 당시 홍 회장을 소환해 1997년 삼성의 대선 자금 제공 과정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동생 회성 씨에게 삼성의 비자금이 전해졌는지 등을 수사했다. 그러나 불법 감청 자료는 그 자체로 위법하게 수집된 것이어서 검찰은 이를 수사의 실마리나 증거로 사용할 수 없었다.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은 당시 이 자료와 관련해 삼성의 ‘떡값’을 받았다는 검사들의 이름을 공개했다가 오히려 통신비밀보호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됐다.
그러나 법조계 주변에선 삼성 관련 의혹에 대한 전방위 특검 수사가 진행될 경우 당시 X파일과 관련해 별도의 증거나 수사 단초가 발견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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