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볼쇼이 발레에서나 본, ‘중력을 초월한 듯한’ 그랑 즈테(큰 도약), 카브리올(재주넘기), 앙트르샤(제자리뛰기) 등 어려운 춤사위를 아무것도 아닌 듯 사뿐히 웃으면서 추어 대는 무용수를 이젠 다른 곳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
유명한 음악 가문 출신인 베를린 필하모니의 전 예술감독 한스 폰 벤다옹이 생전에 내게 들려준 얘기가 생각났다. 천재 파가니니가 오늘날 태어난다면 그는 그저 괜찮은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사람이 될 거라는 얘기였다. 과학 기술과 마찬가지로 예술 기예도 시대와 더불어 장족의 진보를 한다는 시사로 들었다.
40여 년 전 유럽에서 처음 볼쇼이 발레를 구경했을 때 비평가들은 ‘혁명도 초월, 중력도 초월한’ 무용수들의 ‘하늘을 나는’ 기예에 찬사를 퍼부었다. 이런 찬사에 요즈음 나는 저항감을 느낀다. 왜냐 하니 우리는 그 뒤 예술 아닌 과학의 힘으로 ‘무중력’의 캡슐 공간을 만들어 냈고 그런데도 그 진공을 유영(遊泳)하는 우주인의 모습은 발레의 아름다움과는 인연이 멀다는 사실을 보았기에 말이다. 중력을 초월한 듯한 발레의 아름다움엔 중력이 있어야 된다. 철학자 칸트는 공기의 저항이 없는 진공에선 비둘기가 날 수도 없다고 적은 바 있다.
중력 있어야 발레가 아름다워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니 후보자와 그 진영에선 온갖 네거티브, 포지티브 선전이 연일 요란 소란하다. 초등학교 반장도 선거한다면 어른 뺨을 치는 온갖 꼼수가 동원된다. 하물며 국가 최고 권력을 노리는 대통령 선거가 조용히 다소곳이 진행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다른 나라의 선거판을 많이 구경 못 해서 선진국에선 어떻게 이 큰일을 치르는지 잘은 모른다. 그런대로 신문 잡지 방송 보도를 보면 정치가를 ‘품평’하는 데엔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영국이나 미국에선 정치가의 성 추문이 나면 그를 공론권(公論圈)에서 미주알고주알 따지지만 독일이나 프랑스 등 유럽 대륙의 나라에선 비교적 대범하게 넘어가는 것 같다. 물론 그쪽에도 성 추문을 대문짝만하게 취급하는 선정적인 황색신문이야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권위지’로 인정된 신문은 그런 스캔들을 보고도 못 본 척 눈감아 주는 것 같다.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성 추문이 일어났을 당시 독일 친구에게 견해를 물어봤다. “우리는 총리가 공인으로서 낮에 하는 일엔 관심이 있지만 개인으로서 밤에 하는 일엔 관심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번 우리나라 대선에서는 선두를 달리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후보자의 재산과 관련한 의혹, 수사 과정에서의 위증 여부 등 도덕적인 문제를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왔다. 이른바 BBK 사건이다. 난시청석에 앉아 있는 일반 유권자에겐 갈수록 알아듣기 힘든 미궁으로 빠져 들어간 이 사건은 지난주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됨으로써 일단락됐다.
검찰의 발표 이전이나 이후나 1위를 달리는 그 후보의 지지도에는 별 변화가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여론조사의 결과는 검찰 발표를 믿지 않는다는 비율이 믿는다는 비율을 상회하고 문제 된 후보의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 응답자가 ‘없다’고 본 비율보다 높게 나타난 점이다.
‘흠집 있어도 지지’ 의식 변화
이것을 우리나라 유권자의 주목할 만한 의식 변화라 볼 수는 없을까. 도덕적으로 흠집이 있는 후보자라도 지지하겠다는 의사는 단순히 실정을 거듭한 무능한 정부부터 우선 갈아 치워야겠다는 다급함 때문일까. 또는 선거판에 전과자를 내세워 네거티브 공세를 편 2002년 ‘병풍’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혹은 정치판이란 애당초 도덕적 흠집 없는 인사가 흰 비닐 가운을 뒤집어쓰고 활동하는 무균(無菌)의 작업장이 아니라는 걸 유권자들이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일까.
비둘기는 공기의 저항으로 난다는 칸트의 말을 한국적 지혜가 곰삭은 속담은 이렇게 표백하고 있다. ‘구더기가 무서워 장 못 담글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