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점을 목전에 둔 17대 대통령 선거전은 5년 전과는 판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02년 대선 때 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던 이념, 지역, 세대간 대결구도가 확연히 사라졌다.
유권자들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진 가운데 남북문제와 여성, 인권 등 다른 정책 이슈들은 묻히고 '경제 살리기' 논쟁과 '후보자격' 논란만 살아 남았다.
또 정치권 역시 대선보다는 내년 4월에 치러질 총선을 겨냥해 각개 행보에 나서 후보 단일화 등 대선 과정에서의 세력 재편도 미미한 정도에 그쳤다.
◇이념 등 대결구도 변화 =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 대결구도가 사실상 무너진 점은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
5년 전만 해도 진보개혁 진영을 대표하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보수층을 대변하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립구도가 핵심 축이었고, 이보다 앞선 1997년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이념문제는 더 이상 유권자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로부터는 '보수'라는 평가를 받지만, 정통보수를 자처하는 무소속 이회창 후보로부터는 '신(新) 좌파'로 지목받는 독특한 위치에 서있다.
또 노동자를 대표하는 한국노총이 보수정당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와 정책연대를 하고, 기업의 CEO(최고경영자) 출신인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가 독특한 경영방식과 환경·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해온 경력 등으로 진보개혁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점도 이념 대결구도의 퇴조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회 전반의 보수화 경향이 짙어지면서 진보개혁 진영의 '놀이터'였던 인터넷 공간도 보수진영 지지자들이 우세를 차지했다.
지역 대결구도 역시 완화되고 있다. 비록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호남 유권자들이 정동영 후보쪽으로 결집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긴 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역대 대선 사상 처음으로 호남에서 두자릿수 득표율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정 후보가 수도권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도 수도권에 거주하는 호남 출신 유권자들이 지역연고로부터 벗어나 지지후보를 결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영남에서는 이명박 후보가 대세몰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 후보의 대북정책 노선과 도덕성에 회의를 품은 유권자들 사이에 이회창 후보 지지 흐름이 쉽사리 꺾이지 않고 있다.
세대별 지지판도는 한층 큰 폭으로 변화했다. 5년 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에게 열정적으로 표를 던졌던 20, 30대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쪽으로 대거 이동했고, 80년대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386세대'의 주축인 40대에서도 이 후보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정책이슈의 실종 = 2002년 대선에서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진 미선·효순 양 사건으로 연일 거리에서 촛불 시위가 벌어지고, 노무현 후보의 '반미면 어떠냐'는 발언이 큰 파장을 일으키는 등 남북문제가 중요한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또 행정수도 이전 공약과 저소득층 복지대책, 여성과 장애인 인권 등 정책을 둘러싼 논쟁도 후보자 TV토론을 장식하는 핵심 이슈들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는 세부적인 정책이슈들이 모두 사라지고 '경제 살리기'라는 한 가지 구호만 남았다. 이명박 후보가 내세운 '한반도 대운하 공약'이 논쟁거리를 제공했지만, 부정적인 여론이 야기되자 이 후보측이 이를 사실상 뒷전으로 제쳐놓아 그 조차도 핵심 쟁점이 되지 못했다.
정동영 후보는 '좋은 경제와 나쁜 경제', 문국현 후보는 '사람중심 진짜 경제'를 내세우며 이명박 후보의 경제공약을 '개발독재식 삽질경제'로 몰아붙였지만, 대기업 CEO 출신의 이 후보가 일찌감치 형성한 '경제 지도자' 이미지를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후보 자격을 둘러싼 논란, 즉 이명박 후보의 BBK 주가조작 연루의혹, 자녀 위장취업 및 탈세 등 도덕성을 중심으로 한 네거티브 공방전이 선거전의 대부분을 채웠다.
정책이슈가 실종된 이면에는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극단적인 실망감과 '말의 성찬'이었던 개혁노선에 대한 피로감이 깊게 깔려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어떻든 정권교체가 우선'이라거나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는 식의 논리가 유권자들의 표심을 파고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참여정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는 또한 이번 대선을 유권자들이 미래정부의 성격과 비전을 평가해서 표를 던지는 '전망투표'보다는 지난 정부의 실정에 대한 평가와 심판의 의미로 투표에 나서는 '회고투표' 양상으로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총선 영향 = 대선으로부터 불과 111일 후인 내년 4월9일 18대 총선이 예정돼 있다는 점은 이번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정치권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핵심 코드다.
우선 무소속 이회창 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는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내년 총선에서 독자세력으로 임하겠다며 완주를 다짐하고 있고, 민주당도 총선을 의식해 현재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미미한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레이스를 마치겠다는 생각이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와 당 대표가 민주당과의 통합에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당 의원들이 거세게 반발하며 통합 협상을 무효화한 것이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전 대표쪽을 지지했던 일부 의원들이 탈당해 이회창 후보 캠프에 합류한 것도 총선 공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총선은 또한 대선 후 정계개편의 회오리 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한나라당은 벌써부터 대선 후 당권의 향배와 총선 공천 물갈이 폭을 놓고 이런저런 설이 오가고 있고, 신당 역시 이대로 대선을 마치게 될 경우 세력분화와 재편의 과정을 피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이회창 후보가 창당을 공언한 신당과 문국현 후보의 창조한국당, 호남권에 여전히 끈끈한 당원조직을 가진 민주당 등이 독자적으로 세를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경우 내년 4월 총선은 유례없이 치열한 다자 대결구도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디지털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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