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측이 NLL을 설정했을 때 북한 및 중국 측과 합의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북은 1973년까지 20년 동안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이는 NLL에 대한 묵시적 인정, 또는 소극적 승인이다. 묵시적 인정도 국가 간 경계를 상호 인정하는 중요한 근거다. 이른바 ‘미합의의 합의’다.
둘째, 북도 1977년 6월 21일 200해리 경제수역을, 8월 1일에는 50해리 군사수역을 모두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한국은 물론 일본 중국 등 인접 국가들과 어떤 합의도 거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했을까. 이의(異意) 제기는커녕 대통령부터 “NLL이 합의되지 않았다는 북의 주장은 맞다”는 식으로 동조했다.
셋째, 북은 1973년 12월 제346차 군사정전위 회의에서 20년 만에 처음으로 NLL 문제를 끄집어냈다. 왜 하필 그때일까. 6·25전쟁 때 궤멸된 해군(海軍)을 재건하는 데 시간이 걸린 데다, 1970년대 화전병행(和戰竝行) 전략에 따라 한쪽에선 대화하고, 다른 쪽에선 전쟁 준비용으로 남침용 땅굴과 해상 루트를 확보하려 했기 때문이다.
陸上은 땅굴, 海上은 NLL 루트
결국 땅굴과 NLL 무력화는 같은 시기에 시작된 것인데 이는 1차 땅굴이 1974년 11월에, 2차 땅굴이 1975년 3월에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소리는 바다에서 지르고 땅굴은 육지에서 팠으니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 할 수도 있겠다.
넷째, 북에 가장 호의적이던 김대중(DJ), 노무현 정권 때 서해상에선 오히려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99년 6월 연평해전, 2002년 6월 서해교전 모두 DJ 정권 때 일어났다. 그 전 정권에선 없었던 일이다. 북의 NLL 침범도 2001년부터 노 정권 말기인 올해 9월까지 무려 135회나 됐다. 왜 그랬을까. 북은 남의 좌파 집권 기간을 NLL 재설정, 곧 무력화의 호기로 보고 분쟁을 유발해서라도 매듭을 지으려 했기 때문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NLL을 굳이 거론한 이유는 새 정권에선 NLL 문제 하나라도 정확히 아는 사람, 다시 말해 북한을 제대로 아는 지북파(知北派)가 중히 쓰였으면 해서다.
이명박 당선자는 지난주 “북한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겠다”고 했다. 비판하려면 우선 알아야 한다. 모르니까 맹목적 반북(反北)에 빠져 증오만 하고, 모르니까 감상적 친북(親北)에 젖어 눈치나 보고 퍼 주기만 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10·4 남북 정상회담 때 우리 측이 북에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를 제안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령군을 특별지대에 포함시키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대표단은 누구도 강령군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 당황했다고 한다. 황해남도에 있는 강령군을 몰랐다니, 어이가 없다. 특별지대 제안을 하려면 맨 먼저 주변 입지부터 파악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사람들에게 대북정책을 맡겨서 무슨 일이 되겠는가. 적어도 그런 수준에선 벗어나야 한다.
비판도 實用도 北을 알아야
이명박 당선자는 북핵 문제를 포함해 외교·안보의 큰 원칙도 실용(實用)에 두겠다고 했다. 실용 또한 앎을 전제로 한다. 알아야 실익(實益)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볼 수 있다. 모르니까 자주니 민족이니 하는 허울 좋은 구호에 매달려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이다. 모르니까 아는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해 배척하고 미워하는 것이다.
“(상호주의) 원칙을 강조하되 실용적으로 접근하겠다”는 이 당선자의 대북정책이 성공하려면 친북, 반북에 앞서 지북파를 곁에 둬야 한다. 절제된 가치중립(價値中立)의 자세로 오랫동안 이론과 현장을 통해 북을 익힌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고? 없다면 키워야 한다. ‘지북의 전통’을 확고히 세우는 것만으로도 이 당선자는 바른 대북정책의 정립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