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지난해 대선 전날 평양을 방문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나눈 대화록이 10일 일부 언론에 공개돼 파문이 일고 있다.
대선 전날 방북한 김 원장의 행보도 그렇지만, 김 통전부장과 나눈 대화내용, 대화록의 유출 시점 등 해괴한 일 투성이의 이상한 사건이다.
문제의 대화록은 국정원이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대한 업무보고를 위해 작성해 제출한 16쪽 분량의 보고서에 들어 있다. 인수위는 이번 사건을 즉각 ‘국가기밀 유출’로 규정하고 관련자 색출과 처벌을 위한 조사에 나섰다.
▽해괴한 사건=김 원장의 방북은 시작부터 석연찮았다.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정보기관의 장이 대선 전날 방북한 사실이 3일 드러나자 정치권은 ‘북풍(北風)’ 기획 의혹을 제기했다. 국정원은 “남북 정상회담 때 노무현 대통령이 심은 소나무에 표지석을 세우러 갔다”는 납득할 수 없는 해명으로 일관했다.
대화록에 기록된 김 원장의 방북 당일 언행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다. 표지석을 세우러 갔다면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 유력을 알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 ‘현 정부보다 더욱 과감한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강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평소 노 대통령과 ‘코드’를 맞춰 온 김 원장의 언행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다. 다음은 대화록 요지.
△김양건 통전부장=남조선 방문 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부산 북항과 감천항, 신항을 헬리콥터로 둘러보던 장면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만복 국정원장=정상회담 기념식수에 표지석을 설치하는 것은 남북관계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표지석을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부장=남북회담이 지금처럼 많은 적이 없었습니다. 남북관계가 잘 유지됐으면 합니다.
△김 원장=내일 선거에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지만 한나라당의 대북 정책도 화해·협력 기조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한 내 보수층을 잘 설득할 수 있어 현 정부보다 더욱 과감한 대북정책을 추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김 부장=국정원장 자리에 계속 계시게 됩니까.
△김 원장=새 정부가 들어서면 바로 교체될 겁니다. 이런 것이 남측 사회의 기본 질서입니다.
대화록에 따르면 김 원장은 자신이 ‘새 정부가 들어서면 바로 교체될 것’이라며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한 공직자임을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대화록의 내용이 진실인지 의심된다는 얘기도 나온다. 대화 자체가 김 원장과 김 통전부장의 ‘은밀한 얘기’인 데다 현장에서 녹취했는지, 사후에 작성했는지도 불분명하고, 대화 내용도 김 원장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화록 유출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새 정부의 진용을 짜는 시점에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감사원 관계자는 “국정원장과 북한 통전부장의 대화라는 1급 국가기밀을 다룬 문서에는 ‘국가기밀’이라는 도장이 위 아래로 찍히는데 언론에 나온 문건에는 그런 흔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정보 관계자는 “김 원장의 대선 전날 방북부터 대화록 유출까지 세계 정보기관 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해괴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문건 유출 조사=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은 이날 오전 대화록의 유출 경위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인수위는 즉각 내부 조사에 나서는 한편 국정원에 이번 문건을 다룬 관련자들을 보안 조사하라고 요청했다.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인수위 내부에서 유출된 것으로 파악되면 이 당선인이 강조한 대로 일벌백계 차원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 조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당선인에게 보고된 정부조직개편 시안이 20분도 안 돼 언론에 나오는 등 허술한 보안의식이 문제로 대두된 상황에서 이 사건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인수위의 핵심 관계자는 “문제의 보고서는 정무위 간사를 맡고 있는 진수희 의원에게도 보고되지 않았다”며 “국정원이 학계 출신의 한 위원에게 보여 주고 다시 가져갔기 때문에 인수위 내부에서는 자료가 새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수위에서는 국정원에 의혹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김 원장은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이임이 확실하지만 대선 전날 방북에 따른 ‘북풍기획’ 의혹에 몰린 상황이었다.
인수위 관계자는 “김 원장의 평소 성품으로 볼 때 99% 당사자나 측근이 한 일로 보인다”며 “진짜 대화 내용을 아는 사람도 대한민국에서 그들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대화록이 새나갈 경우 누구에게 유리한지를 살피면 유출된 곳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정원 관계자는 모든 의혹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양건의 극비 방한=한편 김 통전부장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 직전인 9월 26일 1박 2일 일정으로 서울을 극비리에 방문해 김 원장 등과 정상회담 의제를 협의하고 노 대통령을 예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정원은 5일 인수위 보고를 통해 김 통전부장이 같은 달 15, 16일 회담 준비를 위해 방북했던 김 원장의 제의에 따라 방한한 사실 등 정상회담의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김 통전부장은 지난해 11월 29일 서울을 공식 방문했다.
신석호 기자 kyle@donga.com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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