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 넘어 ‘국정원 대선 개입’ 조준 할까

  • 입력 2008년 1월 19일 03시 04분


檢‘방북문건 유출’ 김만복 원장 수사로 가닥

검찰이 18일 치열한 내부 토론을 거쳐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을 수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서 김 원장의 소환 조사가 사실상 ‘택일’만 남겨놓은 듯한 상황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김 원장에 대한 수사 착수가 국정원과 관련한 각종 의혹 수사의 출발점으로 보는 관측이 많아 향후 수사의 파장이 만만찮을 것으로 전망된다.

▽판단 배경=검찰은 그동안 김 원장이 중앙일보와 전직 국정원 직원에게 배포한 자료가 비밀에 해당하는지를 중점적으로 분석해왔다. 비밀 여부가 수사 착수의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수사 착수냐, 유보냐 사이에서 고민하던 검찰이 수사를 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은 무엇보다도 김 원장이 외부에 유출한 자료의 중요성을 감안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보고한 김 원장과 북한의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간 대화록, 방북 배경 경과 보고서를 김 원장이 통째로 외부에 유출한 것은 공무상 비밀누설에 해당할 소지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비록 국정원이 대화록 등을 비밀로 공식 분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비밀로 보호할 만한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건의 ‘실질비성(實質秘性)’이 있다는 데는 검찰 간부 다수가 의견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졌다.

비공개로 유지되어야 할 정보기관장의 동선(動線)이나 대화 내용, 방북한 남측 인사와 북측 인사의 대화 내용이 상세히 공개되면 향후 대북 협상과정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됐다.

인수위 측이 “(대화록 유출은) 국기 문란 행위로 유야무야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밝히면서 검찰의 인지(認知) 수사를 촉구한 것도 검찰을 압박한 변수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

▽수사 전망=검찰은 우선 대화록과 보고서의 전달 경로를 파악할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장이 중앙일보와 전직 국정원 직원 외에 누구에게 전달했는지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문건의 원본을 확보하는 한편 김 원장이 전달한 문건이 또 다른 제3자에게도 건네졌는지 확인할 방침이다.

국정원이 “방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문건을 배포했다”고 밝힌 만큼 김 원장의 방북 의혹을 제기한 한나라당 관계자에게도 일부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검찰은 김 원장이 건넨 문건의 비밀성 여부의 판단 외에도 방북 경위와 목적, 김 통전부장과의 실제 대화 내용 등에 대한 수사도 진행할 것으로 보인다.

김 원장은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심은 나무의 표지석 설치를 위해 대통령 선거 하루 전 북한을 방문했다”고 해명해 왔지만 국정원 내부에서도 “잘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많았다.

이에 따라 김 원장과 김 부장이 나눈 비공개 대화 내용의 실체에 대해서도 조사가 이뤄질 가능성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10·4 남북정상회담을 둘러싼 이면 거래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향후 파장=검찰 주변에선 이번 수사착수가 단순히 문건 유출 의혹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검찰 수사가 김 원장의 연루 의혹이 제기된 다른 사건으로 확대되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BBK주가조작사건’의 핵심인물 김경준(42·구속 기소) 씨의 기획입국설이나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뒷조사 의혹 등에 대한 검찰 조사가 주목을 끌고 있다. 국정원장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국정원 조직의 특성상 국정원의 개입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 국정원장의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검찰은 기획 입국의 배후를 캐내려 김 씨를 압박하고 있으나 김 씨가 2주 전부터 검찰 출두를 거부하며 “특검에서 조사받겠다”고 주장해 수사가 답보 상태다. 그러나 보석 기각에 이어 특검에서도 검찰 수사와 대동소이한 결과가 나온다면 김 씨가 기획입국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앞으로 김 원장의 사표가 수리되면 국정원 내부의 동요와 함께 새로운 제보가 나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갖는 무게감이 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靑-국정원 반응

청와대“검찰 수사해도 김 원장 거취 변함없을 것”

국정원“조직 망가질 우려… 靑 왜 거취결정 않나”

검찰이 18일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의 ‘평양 대화록’ 유출 사건을 수사하기로 사실상 방침을 정했지만 청와대는 “검찰 수사는 검찰 스스로가 판단할 일”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당사자인 국정원 직원들은 업무가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그간 참여정부와 검찰 간 수사를 둘러싼 사전협의란 없었다”며 청와대와 검찰 수사가 무관함을 강조했다. 청와대는 또 검찰 수사와 김 원장의 거취 문제는 별개라는 견해를 보였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검찰 수사가 김 원장의 사표 수리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참고사항은 되겠다”고만 했다. 이 관계자는 “문제의 대화록이 국가기밀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변호사 등 외부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호선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도 정례 브리핑에서 “김 원장의 거취에 대한 저희 방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다. 검찰 수사에도 불구하고 당장 김 원장의 사표를 수리하지는 않겠다는 말이었다.

반면 직접적인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국정원은 공식 반응을 내놓지는 않았지만 직원들은 조직에 대한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국정원의 한 중견 간부는 “큰일 났다”고 한숨을 내쉬며 “안기부 X파일 사건 때 흔들렸던 조직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골치 아프게 됐다”고 우려했다. 그는 “청와대가 김 원장의 거취를 빨리 결정해줘야 하는데, 왜 안 하는 거냐. 청와대가 원망스럽다”고 말했다.

국정원의 한 실무자는 “김 원장의 문건 유출에 대해서는 직원들 모두 비판적이지만 검찰 수사까지 받게 되면 국정원의 위상이 심각하게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우려가 많다”고 국정원 내부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국정원이 지난 10년간 위상이 떨어져왔기 때문에 직원들은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조직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기를 기대했다”며 “하필이면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시기와 맞물려 검찰 수사를 받게 돼 걱정이다”고 덧붙였다.

국정원의 한 중간 간부는 “현직 국정원장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 조직이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면서 “청와대와 검찰이 국정원 조직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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