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봇대 아직 있다

  • 입력 2008년 1월 19일 03시 04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탁상행정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한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내 산업도로에 있는 전봇대. 선박 블록을 나르는 대형 운반차량의 운행이 잦은 이 지역에 빽빽이 들어선 전봇대는 차량 운행에 지장을 주고 있다. 영암=박영철 기자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탁상행정의 대표적 사례로 지적한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내 산업도로에 있는 전봇대. 선박 블록을 나르는 대형 운반차량의 운행이 잦은 이 지역에 빽빽이 들어선 전봇대는 차량 운행에 지장을 주고 있다. 영암=박영철 기자
李당선인“화물운송 막는 전봇대 하나 못옮기며 무슨 규제개혁”

2006년 방문 대불산단 사례 들어 탁상행정 질타

대형트럭 커브 못돌아 민원 빗발쳐도 시정 안돼

지자체 “예산 탓”… 산자부 오늘 점검단 현지파견

“선거 때 대불산단에 가 봤는데, 산단 옆 교량에서 대형 트럭이 커브를 돌려고 하니 폴(전봇대)이 서 있어서 안 되더라. 그 폴을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됐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사무실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기업 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고 웃는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18일 규제를 개혁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는 탁상행정의 사례로 꼽은 내용이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사무실에서 열린 인수위 간사단 회의에서였다.

이 당선인은 “산자부 국장이 나와있어 물어봤더니 도(道)도 권한이 없고 목포시도 안 되고 산자부도 안 되고 서로 그러다 보니 폴 하나 옮기는 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기업 활동에 지장을 주는 이 전봇대는 이 당선인이 2006년 9월 방문한 뒤 어떻게 변했을까. 기자가 현장을 찾았다. 결론은 ‘그때 그대로’였다. 도로는 좁았고 전봇대와 전선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산업자원부는 19일 점검단을 현지로 파견해 실태조사에 나선다.

▽트레일러 가로막는 시설물=18일 오후 11시 반경 전남 영암군 삼호읍 대불산업단지. 선체를 나눠 조립하는 블록생산 공장 50여 개가 입주한 곳이다.

대불산단은 현 정부가 ‘혁신 클러스터’로 지정해 2010년까지 세계 1위의 중형 조선산업단지로 만들려는 곳이다.

폭 6m, 높이 10m의 대형 트레일러가 산단 앞 대불산기㈜ 사거리로 나섰다. 왕복 4차로 중 한 방향의 차로 2개를 모두 막고 운행하는 바람에 다른 차량이 움직이지 못했다.

트레일러가 천천히 움직이다가 가로등(높이 9m)과 전선(10m)을 만났다. 운송 업체가 교통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낮에 미리 손을 써서 부딪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업체 관계자들은 이날 낮 크레인을 이용해 도로변 가로등의 방향을 돌려놓거나 아예 들어냈다. 가로등 10개를 해체하고 조립하는 데 6시간가량 걸렸다. 이런 작업을 매주 한두 번 되풀이한다.

교통시설도 문제였다. 트레일러는 진행 방향에 있는 4m 높이의 도로표지판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 차로로 돌아가는 곡예운전을 했다.

화물중량을 포함해 100∼300t에 이르는 대형 트레일러는 4km 떨어진 대불항까지 나가는 데 4시간가량 걸렸다.

블록 운송업체 ‘공단운수’의 송영철(44) 씨는 “영암군청이나 한전에 매일 하소연을 하다시피 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푸념했다.

▽왜 개선되지 않을까=대불산기㈜ 사거리 부근의 전봇대는 대부분 대불산단이 처음 조성된 1988년부터 설치됐다.

단지가 처음 생길 때는 일반산업단지였다. 그때만 해도 선박용 대형 블록을 제조하는 조선 관련 협력업체가 거의 없어서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대형블록 생산업체가 잇따라 입주하면서 옛날 전봇대는 ‘물류의 흐름을 막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동진특수의 윤명수(42) 과장은 “대불산단이 처음부터 대형 구조물 운송에 적합하지 않은 도로시설물을 갖췄는데 철거하지 못한 게 문제”라며 “산단 내 전봇대와 가로등을 비롯해 모든 시설물을 철거하려면 수백억 원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업체 관계자들은 예산 부족도 문제지만 지자체와 한전의 서비스 정신이 부족해서 해결이 늦어진다고 지적한다.

시설물 개선과 관련된 기관이 여러 곳이어서 책임을 상대방에게 미룰 뿐 어느 기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산단 내 도로나 가로등, 공원 등 일반 시설물은 영암군이, 입주업체 관리는 한국산업단지공단이, 단지분양은 한국토지공사 대불사업단이, 전봇대와 전선 이설은 한전이 맡는다. 어느 한 곳만 나서서는 기업의 민원을 풀기 어려운 구조이다.

▽뒤늦게 대책 마련에 부산=전남도와 영암군, 한전은 “올해까지 전선 지중화(地中化) 공사를 마치면 전선에 걸려 대형 차량의 통행이 늦어지는 불편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기관에 따르면 이 당선인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인 2004년부터 업체의 애로사항을 해소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전남도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46억 원을 들여 산단 내 전체 전선 38km 중 21km 구간의 지중화를 마쳤고 올해 20억 원을 들여 주요 교차로 등 5km 구간을 마무리하면 2차로 이상의 도로는 차량 통행에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전선을 지하에 묻어도 지상의 전봇대는 그대로 남는다는 점. 전봇대 하나를 없애는 데 수천만 원이 필요하지만 한전과 함께 절반씩 비용을 감당해야 하는 전남도와 영암군의 재정 여건이 좋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한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업체는 한전에 의뢰해서 전선을 끊었다가 연결할 때마다 200만∼300만 원을 부담해야 한다.

한전은 이 당선인의 발언이 알려진 이후 영암지점 직원을 동원해 문제의 전봇대를 찾고 관련 기관과 회의를 하는 등 뒤늦게 대책 마련에 나섰다.

영암=김권 기자 goqu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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